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인물

이상설 (보재ㆍ1871)ㆍ안중근의 정신적 스승ㆍ헤이그 밀사

by 당대 제일 2022. 9. 30.
반응형

 

"이상설 (李相卨ㆍ1871~1917ㆍ44세)"은  1907년, "헤이그 회담ㆍ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고, "헤이그 밀사"와 관련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1917.04월,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1. 이상설 (李相卨1871~1917향년 44)

조선(대한제국) 문신(성균관 교수영의정(1개월))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 (안중근의 정신적 스승)

1907, "헤이그 회담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이바지하였다. "헤이그 밀사" 관련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ㆍ1909,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1910, "13도의군(의병 규합)"을 편성ㆍ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정부의 수립" 시도

대한광복군(최초 망명정부)창설간도 첫 근대식학교 세워 인재양성ㆍ1914, "대한 광복군 정부(최초의 망명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

 출 생 : 충북 진천군

  사 망 :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 (연해주 강가에 쓸쓸한 유허비가 있음)

  사 인 : 병사

  유 언 : 내 몸을 불태워, 수이푼 강물에 보내라. 죽기 전에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 보재 (溥齋)ㆍ혹은 "부재"라고도 읽음

학 력 : 1894- 전시(殿試) 문과에 병과 급제

저 서 : 1900- 산술신서(算術新書)

• 경 력 : 1905.01~ 03 : 대한제국 법부협판 1905.03~12 : 대한제국 의정부 참찬 1914~ : 대한광복군 정부 정통령 1911,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창설 1914,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

2. 안중근의 정신적인 스승 : 이상설

"안중근(1879~1910) 의사"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작성된 "일본 헌병대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비밀보고서가 공개됐다. "일제" "안중근 의사"의 배후를 캐기 위한 문서였다. "비밀보고서"에는 "안응칠(안중근 아명)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간도에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안중근 의사" "간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함이었다"안중근 의사" "뤼순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은) 포부가 매우 크고,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큰 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적 스승"을 평했다.

3. 헤이그 밀사 사건

1894,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896,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 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에 접한다1904, "일제""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1905, "법부협판의정부 참찬"을 지냈다이 무렵부터 그는 외국 서적 등을 참조하며,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1905, "을사조약" 체결 당시, 그는 "조약체결 결사반대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이후 "국권 회복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1906,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1달 동안 있다가 사직하였다.

1907,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회 만국 평화 회의"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이준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헤이그 밀사"에 실패한 그는 1908,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회""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1909,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 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4. 국권회복 운동

이에 앞서 1906"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 운동에 논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이곳에서 "여준왕창동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항일민족 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서전서숙"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 "북간도" 일대는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용정촌"에 도착한 "이상설"은 먼저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8칸짜리 한옥을 샀다당시로선 꽤 큰 집이었다. 그리고 학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서당식 교육"에서 벗어나, "간도 땅"에 세운 첫 근대식 학교였다지속가능한 인재 양성과 지속가능한 항일 투쟁을 위한 남다른 통찰이었다.

"용정촌"에는 지금도 "이상설"의 이름을 딴 정자 "이상설정"이 서 있다"서전서숙"을 세운 이듬해인 1907"고종 황제""이상설""헤이그 밀사"에 임명했다"이상설"이 떠나자, 학교는 재정난을 겪다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서전서숙""씨앗"이 됐다"용정"에 있던 "서당(3)"가 힘을 합해, 근대식 민족교육기관 "명동서숙(명동학교 전신)"을 세우는 주춧돌이 됐다"러시아만주 국경" 지방 사이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퇴위된 상태에 있는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정부의 수립"을 시도했었다.

1910"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미국러시아 제국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하여, "러시아 제국"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 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1914,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러시아 제국 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31운동 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러시아 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들의 정치사회 활동을 철저히 엄금했기 때문에, "대한광복군 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 당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