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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 • 명리학

역사서 ⑤ 징비록 (懲毖錄ㆍ1604 (선조37))ㆍ 류성룡 (영의정)

by 당대 제일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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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은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경험한 사실을 기록한 실기로, "징비"는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스스로를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문장에서 따왔다.

 

1. 류성룡 (柳成龍ㆍ1542~ 1607ㆍ65)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의정부 영의정)인문학자의학자"징비록(懲毖錄)"의 저자남인ㆍ이순신 천거청백리(청렴하고 정직)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1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요신(이순신의 형)"과 친구사이기도 하다"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 "4도 도제찰사ㆍ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 "정인홍ㆍ이이첨"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2. 징비록 (懲毖錄ㆍ1604(선조37)ㆍ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긴 것ㆍ국보 제132)

① 개 요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 때인 1592(선조25)~ 1598(선조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  "임진왜란""원인경과자신의 잘못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임진왜란 전란사"로서,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전황"등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은 이후,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징비록>의 성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7년의 전쟁이 끝나고,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낙향했던 1598년부터 그 집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1604(선조37) 저술을 마쳤다 특히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는 이()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치양지설(致良知說)""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징비록>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② 저술 동기

"징비"<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 앞날을 대비하며 왜란을 겪은 후,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조선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

③ 내 용

1633(인조11), 류성룡의 아들 "류진(柳袗)"이 아버지의 문집 <서애집(西厓集)>과 합본된 형태로 "징비록"을 간행하였고, 1647년 다시 독립된 "167"으로 간행했다.   오래된 "징비록"의 간본은 "16권 본""2권 본"2가지가 있다 앞서 등장한 것이 "16권 본"이고, 나중에 "2권 본"이 나왔는데, "16권 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2: 총론(総論)        3~ 5: 근포집(芹曝集)- ()계사(啓辞)          6~ 14: 진사록(辰巳録)- 치계(馳啓)복명(復命)          15~ 16: 군문등록(軍門謄録)- 계초(啓草)문리(文移) / 녹후잡기(録後雑記)

④ 일 화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직전발발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586, "쓰시마 도주(島主) 귤강광(橘康廣,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広))"토요토미"의 서신을 갖고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의 행렬 좌우에 늘어선 "조선군" 병사들이 들고 선, 창을 보고 "당신네들의 창은 참 짧군요. 그래"하고 비웃었다.

1591,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通信使)의 정사 황윤길(正使 黄允吉)""부사 김성일(副使 金誠一)"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선조"에게 일본의 사정을 보고했는데, "황윤길""반드시 병란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달리 "김성일""신은 왜국에서 그런 징후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592.04.15,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동래(東莱)"로 쳐들어갔을 때,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분전하다 죽었다. "송상현"은 왜병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마다한 채, 죽는 것을 택했고, 왜인들은 그러한 "송상현"절의에 감탄하며, 그의 시신을 관에 넣어 정중히 매장하고, 그의 무덤에 묘표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명의 심유경(沈惟敬)""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서로 친한 사이로, 사사건건 서로 감싸주었고, 임시변통의 조치로 전쟁을 멈추려 했다.

왜군은 조선에서 수많은 살략을 자행하였고, 이는 <징비록> 속에 고스란히 묘사되었다 1597, "정유재란(게이초의 역)"에서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잡은 포로나 시신의 목에서 코를 베어내는 장면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제가 왜군의 실태보다, 조선군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국방의식에 대한 비판에 무게가 실려 있는 만큼, 주된 내용은 왜군에 대응하는 조선 측의 허술함 또한 비판하고 있다.

1598.10,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벌어진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싸움이 아직 다급한 판인데,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징비록>에 따르면, 1597"이순신"이 역모를 당했을 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나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 몹시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류성룡은 "선조"앞에서 직접 "이순신"을 변호하였으나, "선조"1"류성룡""경기지방"에 보내 순찰토록 했다 류성룡이 1달 뒤에 돌아와 보니, 그 사이에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류성룡은 "사직"을 결심하고, 2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무려 10여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원익정탁" 두 사람만이 "순신"을 옹호하여, "이순신"은 간신히 "참수형"을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조치되었고, 이때 살아남은 "이순신"은 복직 후, "정유재란""명량해전"에서 대활약을 하여 조선을 또다시 구하게 된다.

영 향

<징비록>은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전해져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유입된 <징비록>"2권 본"으로 1695년 일본 "교토""야마토야"에서 "야마토야 이베에"가 일본어 훈독을 달아, 간행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임진년정유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의 조선 측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진주성"에서 왜병을 상대로 벌어진 2차례의 격전에서 왜군에게는 "모쿠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무장 김시민(金時敏)"이 실은 "1차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했었다는 사실도 <징비록> 일본 간행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숙종"1712<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된 것에 대해, 조선의 정보가 유출될까봐 경계하여, 금단하였다고 한다 1936, "조선사편수회"에서 "경북 안동군 풍산면 하회리 종가"의 소장본인 "저자 자필의 필사본(筆寫本)"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11><초본 징비록(草本 懲毖錄)>이라 하여, 300부를 영인하여 출간하였다.

1958,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서애집(西厓集)>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광사(廣史)> 3집에도 <징비록><녹후잡기>가 합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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