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三國遺事) : 김알지 (金閼智)ㆍ탈해왕대 (脫解王代)
"노례왕과 탈해는 각기 떡을 깨물어 잇자국이 생기도록 했다. 그것을 가지고 살펴보니, 노례왕의 이가 더 많았다. 그리하여 노례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다. 잇금, 이사금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1. 신라 3대 왕 "유리 (노례왕)"
"신라"의 역사는 "박혁거세 거서간 (朴赫居世 居西干)"으로 시작하여, "남해 차차웅 (南解 次次雄)"에 이어 제3대 왕 "유리 이사금 (儒理 尼師今)"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합니다. "유리 이사금"은 "노례 이사금 (弩禮尼師今)"이라고도 불리며, 재위 기간은 서기 24~ 57년까지였습니다. 그의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사금"이라는 왕의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2. "유리 이사금 (노례왕)"의 즉위ㆍ치세
"유리 이사금"은 신라 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자, "박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입니다. 어머니는 "운제부인 (雲帝夫人)"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4년에 왕위에 올라, 34년간 신라를 다스렸습니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에 따르면, "남해 차차웅"이 죽은 후,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석탈해 (훗날 탈해 이사금)"가 서로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지혜로운 사람은 "이 (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이 자국"을 세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유리"의 "이 자국"이 더 많았으므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왕호를 "이사금"이라 칭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를 선별하는 당시 사회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유리 이사금"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는 내부적으로 안정을 꾀하고, 외부적으로는 주변 부족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립해 나갔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이 "내가 모자란 몸으로 군림하매,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하여, 노약자들을 이런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으니, 이는 내 죄이다"라고 말하며, 민생의 어려움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통치자가 "백성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의 재위 14년 (42년)에는 "이서국 (伊西國)"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신라"가 건국 초기부터 주변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성장해 나갔음을 보여줍니다.
3. "이사금" 칭호의 의미ㆍ유래
"이사금 (尼師今)"은 "신라의 군주"를 뜻하는 칭호 중 하나로, 3대 "유리 이사금"부터 18대 "실성 이사금"까지 약 330여 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현대 한국어의 "임금"이라는 표현의 어원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금"이라는 칭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위에서 언급한 "유리 이사금ㆍ석탈해"가 떡을 깨물어, "이 자국"을 세어 왕을 정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잇금 (齒理) 설"입니다. "잇금"은 "이의 자국"을 의미하며, 이는 "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많고 지혜롭다는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연장자"가 지도자가 되는 부족 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칭호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사금 = 니 (가장ㆍ으뜸) + ㅅ + 금 (큼ㆍ크다ㆍ위대한)"의 차자 표기이며, "임금"으로 변천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사금"이 "금 (今)"이 일본어의 "카미 (神)ㆍ키미 (君)"와 어원이 같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사금"은 "신라" 왕호 변천사에서 중요한 단계에 해당합니다. "신라"의 왕호는 시조인 "박혁거세"의 "거서간 (居西干)", 2대 "남해왕"의 "차차웅 (次次雄)"에 이어, 3대 "유리 이사금"부터 "이사금 (尼師今)"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17대 "내물왕"부터는 "마립간 (麻立干)"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왕호의 변화"는 "신라"의 정치 체제와 왕권의 성격이 점차 발전하고,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됩니다.
"신라" 3대 "유리 이사금 (노례왕)"은 "이사금"이라는 새로운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신라" 초기의 왕권 체제와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사금"이라는 칭호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 당시 신라 사회의 "왕위계승 방식ㆍ지도자 선택의 기준ㆍ지배층의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단서입니다. 이를 통해 "신라"가 건국 초기 "부족 연맹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점진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거서간 (居西干)
"수장ㆍ통치자"를 의미하는 가장 원시적인 왕호로, "제사장적 의미"가 강합니다.
② 차차웅 (次次雄)
"무당"을 의미하며, "남해왕"이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지배자가 "정치ㆍ제사"를 모두 주관하는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③ 이사금 (尼師今)
"잇금ㆍ즉 이의 자국"을 통해, "연장자ㆍ지혜로운 사람"을 선별하는 방식에서 유래한 칭호입니다. 이는 부족 연맹체 사회에서 왕위 계승이 아직 확고한 세습 원칙에 기반하기 보다는 덕망과 지혜를 갖춘 자가 추대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④ 마립간 (麻立干)
"말뚝ㆍ간"을 의미하며, "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장들이 모여 있는 형태로 왕권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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