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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사건- 1905 :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조선ㆍ필리핀 분할?)

by 당대 제일 202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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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태프트 밀약"이라는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1905.07.27일, "가쓰라 다로 (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ㆍ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 육군 장관)"이 "도쿄"에서 회동에서 나눴던 대화 중, "기밀"로 분류된 대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1.  가쓰라- 태프트 밀약 (협정ㆍTKSA (Taft-Katsura Secret Agreement))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을사늑약(1905.11.17)"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이 "밀약"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배제한 "일본"은 "제2차 영ㆍ일 동맹(1905.08.12)"과 "포츠머스 조약(1905.09.05일)"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 일 시 : 1905.07.27일 (각서는 1905.07.29일에 완성)

• 목 적 : "조선 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ㆍ "러ㆍ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회담하였다.

• 내 용 : 일본제국의 한국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라는 양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상호 확인ㆍ기록 내용은 "미ㆍ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ㆍ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미ㆍ일" 관계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 있었다.

• 결 과 : "미국"은 "일본ㆍ러시아"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본"이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가쓰라

< 각서의 요지 >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親日)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극동의 전반적 평화의 유지에 있어서는 일본ㆍ미국ㆍ영국 삼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極東)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서,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므로, 이는 "미국"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협력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태프트"가 "자신의 의견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만의 의견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ㆍ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제"가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가쓰라- 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며, 이 밀약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 식민지배"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 식민지배"를 상호 양해한 일종의 "신사협정"이었다.

이 합의로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일제"는 1905.11.17일,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2. 배 경

"만주"를 둘러싸고, "일제""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던 1904.02, "일제""대한제국""한일의정서"를 맺는 동시에, "아서항"을 공격해, "일 전쟁"이 발발하였다내부의 "혁명 세력의 반발"로 인해, 전쟁에 힘쓸 여력이 없었던 "제정 러시아 군대"는 패전을 거듭하였다1905.05, "일제""대한시설강령"을 통해, "한반도" 내 주요시설을 강점했으며, "대한해협"쪽 수로인 "쓰시마 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침몰시켜 승기를 잡았다.

"일 전쟁"이 끝을 바라보던 즈음, "루스벨트(미 대통령)"1905.07"태프트(미 육군장관)" "도쿄"에 파견하여, "가쓰라 다로(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와 비밀 회담을 하게 했다.  "일본""러시아"와의 일전에서 승리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미국의 중재로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수용한다. "미국"1898"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완승하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푸에르토리코"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 "대한제국"의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 대해 제한적인 관심만을 드러냈고, 경제적 이익이 낮다는 판단 하에 점점 손절하던 상황이었다"일본""일 전쟁"의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승리했으나, 고작 "남만주 철도"와 한반도내 "우세권 편입"만 인정받았고, 현실적으로 그 이상의 대가는 국력의 한계로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잠재적 경쟁자인 "미국"과의 세력권 분할에 동의하게 된다.

줄곧 "미국""먼로 독트린" 이래, "고립주의 정책"을 취해 왔으나, 대륙횡단철도 개통으로 태평양에 관심을 두고, "하와이"를 병합하고, 팽창주의자 "루즈벨트"가 취임하고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획득했으나 상비군이 매우 적고, 다른 열강과 달리 의회의 강력한 권한이 있어서, 대통령과 정부 독자적으로 외교 정책을 펴기엔 무리가 있었고, 동양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세력권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먼로 독트린 (먼로주의) :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원칙이었지만, 국제 정치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1823, "제임스 먼로(5대 대통령)"가 의회에 밝힌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 방침으로서, 유럽 열강으로 하여금 더 이상 미 대륙을 식민지화하거나 미 대륙에 있는 주권 국가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는 내용이다 이는 "북미"는 물론 "중남미"까지 미국의 세력권에 두겠다는 외교 정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3. 내 용 (회담에서 다뤄진 문제들)

① "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논의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ㆍ미국ㆍ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②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

"가쓰라"는 "러ㆍ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ㆍ협정을 맺어, "러ㆍ일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ㆍ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전쟁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게 하도록,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이며,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태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말했다.

③ "필리핀"에 관한 논의

"태프트"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에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공격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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