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광 (柳子光ㆍ1439~1512ㆍ73세)"은 조선 중종 때의 정치인(의정부 좌찬성)ㆍ무신ㆍ군인ㆍ"서얼(庶孼)"출신으로 "6조(六曹)"에 임명된 첫 사례ㆍ"사림파"에 의해,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간신(奸臣)"으로 비판받았다. 5대(1455~1512ㆍ세조ㆍ예종ㆍ성종ㆍ연산군ㆍ중종) 동안 총애를 받았고, "연산군"때는 "간신"으로 권력을 영위했다.
1. 류자광 (柳子光ㆍ1439~1512ㆍ향년 73세)
"서자ㆍ경복궁 문지기" 출신ㆍ사림파(김종직과 원한 관계)"에 의해, "조선 3대 간신(奸臣)"으로 비판ㆍ"서얼(庶孼)"로, "육조(六曹)"에 임명된 첫 사례ㆍ중종 때의 정치인(의정부 좌찬성)ㆍ무신ㆍ3번이나 공신에 책봉 : 적개공신(세조, 이시애의 난(1467))ㆍ익대공신(예종, 남이의 옥(1468),남이장군 사사)ㆍ성종ㆍ연산군(무오사화, 갑자사화)ㆍ정국공신(중종, 중종반정(1506))
"서자"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었다. (이시애의 난 : 버려진 함경도 호족인 "이시애"가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으로 일으킨 난) "남이의 옥(1468)"처리로 "예종"의 총애를 얻었고, 1468.11월 "남이"가 살던 집→ "류자광"에게 하사 (사형당한 "강순"의 아내 "중비(仲非)"와 "민서(閔敍)"의 첩의 딸 "민말금(閔末今)"을 노비로 하사)
1485년(성종14) "한명회"가 은퇴하면서, 조정에서 실력자가 된다. "사림파 "공격에 가담하여, "무오사화(1498, 연산군4)"와 "연산군의 갑자사화(1504, 연산군10)"을 도왔다. "중종반정"에도 동참하였다. "기묘사화(1519,중종14)이후, 10년 뒤에 "사림파" 재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 출 생 : 전라도 영광군→ 전라도 남원군→ 한성부 • 사 망 : 경남 (묘소- 전북 남원군 남원읍 고죽동(부인과 합장)) • 사 인 : 병사 (눈병) 유배→ 장님→ 유배지에서 병사 • 처 : 죽산 박씨 (죽산인 박치인(朴致仁)의 딸)
• 자 녀 : 아들- 류진(柳軫)ㆍ류각(柳角)ㆍ류방(柳房ㆍ자살) • 부 모 : 부 - 류규(柳規ㆍ1400~1473)ㆍ모(나주 최씨,첩ㆍ노비) • 경 력 : 1468년(세조14)-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 급제(낙방하였으나, 세조의 배려로 특별 급제)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1467)ㆍ남이의 옥(1468)"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14)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으나, "세조"의 특별 배려로 합격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이 되고, 1468.06월 "고령군 신숙주(申叔舟)ㆍ상당군 한명회(韓明澮)ㆍ능성군 구치관(具致寬)ㆍ영의정 조석문(曹錫文)ㆍ우의정 강순(康純)ㆍ동원군 함우치(咸禹致)ㆍ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영복정(榮福亭)"에 가서, "조선(漕船)"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관직은 "병조판서ㆍ판한성 부사ㆍ황해도 관찰사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남이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남이의 옥(1468))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 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1498, 연산군4)"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고, 특히 "임사홍" 등과 함께 "연산군"의 "갑자사화(1504, 연산군10)"를 도왔다. 1507년(중종1)1월, "왕실"에서 "사찰"을 건립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왕실을 옹호하여, "대간(臺諫)과 사헌부, 홍문관"의 계속된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1512.06월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죽자, "중종"은 그가 "반정공신"이었으므로,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되돌려주고,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 인 물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멸시 대상이 되었다.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인물로, "의술ㆍ음악ㆍ지리"에도 능통했다. 류지광은 "자신이 여종의 아들"이라 미천한 종이나, 악공(樂工)과 화원(畵員)등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였고, 왕에게 "도공(陶工)"들을 아끼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504.10월, "사옹원 제조(提調)"로 있을 때, 류자광은 "수라청"의 나인들이 "수라상(水剌床)"을 힘들게 옮기는 것을 보고 동정하여, 10.01일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할 것"을 건의하며, 하인들을 아끼라고 청하였다.
3. 사림파 "김종직"과의 갈등
"성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사림파"가 정계에 등용되었는데, 이 때 류자광은 "사림파" 인사들과 충돌한다. 이후 류자광은 "언문(諺文)"을 장려ㆍ보급하자고 건의하였다가 "사림파"에게 비판받았으며, "경남 함양군"으로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현판"하게 하였는데, 나중에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류자광이 쓴 현판을 저주하며 떼어버리자, 분통해 하며, 원한을 품었다.
"김종직"은 "남이"의 "역모(남이의 옥사)"의 배후를 류자광으로 보고, 혐오하고 경멸(輕蔑)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류자광이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류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으나, 이 일은 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류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 성분에 열등감이 있던 류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한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 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류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하면서, "김종직"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자 "김종직"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 수(首) 지어 보시오!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서 한 조롱으로, 무안당한 류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는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류자광은 선비들에게서 이렇게 모욕당하자, "이극돈ㆍ임사홍"등과 손잡고 "사림파" 선비들을 몰살시켰다.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류자광은 1498년(연산군4) 음력7월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파"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의금부ㆍ형조"에서 고문당할 때,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입수하여 사본을 내놓으면서, 이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 라며,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에게 바치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류자광"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스스로 주석(註釋)해, 문구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고 이어,
"김종직이 세조에게 부름 받았는데도 감히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세조를 비방(誹謗)하고 헐뜯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서 논죄하고, 그 남자가 지은 글은 후세에 전파(傳播)되어서는 아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라며, "김종직"의 저서와 작품의 압수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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