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金宗瑞ㆍ1383~1453ㆍ70세)"는 "무장"으로 유명하나, 당초 "문과"에 급제한 "문인"으로, "안평대군의 시회"에 참석하여, "몽유도원도시축"에 "오언고시"를 남겼다. 1433.12월, "함길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6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 김종서 (金宗瑞ㆍ1383~1453ㆍ향년 70세)
문신ㆍ무신ㆍ군인ㆍ정치가ㆍ시인ㆍ4대 왕(태종ㆍ세종ㆍ문종ㆍ단종)을 모신 충신ㆍ"고려사ㆍ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ㆍ몽골 정벌ㆍ6진 개척(만주족(여진족))ㆍ"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
• 출 생 : 고려 양광도 공주목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번지) • 사 인 : 철퇴 (수양대군의 명으로 "종 임운"→ 도성의 4대문 배회→ 박제함 (홍달손의 지시) • 묘 소 : 충남 공주시 장기면 (현, 세종시 장군면) 세종시 "장군면"의 "장군(將軍)"은 "김종서"를 가리키는 것이며, "의당면"에 그의 "생가 터"가 있고, "장군면"에 그의 "묘"가 있는 데서 유래한다.
• 호 : 절재(節齋) • 별 칭 : 대호(大虎)ㆍ성상 위에 좌상 (전횡ㆍ독단이 너무 심했음) • 학 력 : 1405- "식년문과 동진사" 13위 급제
• 처 : 파평 윤씨(윤원부의 딸)ㆍ측실- 2명(1명은 "여진족" 출신) • 자 녀 : 3남 1녀 (김승규ㆍ김승벽ㆍ김승유) • 가 족 : 부- 김추(金錘ㆍ도총제(都摠制)) / 형- 김종한(金宗漢ㆍ이조판서)ㆍ동생- 김종흥(金宗興ㆍ양주부사)
1405년(태종5), "식년문과 동진사" 13위로 급제하여,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ㆍ지평(持平)ㆍ집의(執義)ㆍ우부대언(右副代言)ㆍ평안도 도체찰사ㆍ형조판서ㆍ의정부 우찬성" 등을 지냈다. 1433년,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 경계와 수비를 7년 동안 맡았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의 "의정부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고, 특히, "학문ㆍ지략"에 "무인 기상"을 갖춘 당시 "김종서"의 위세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수양대군(당시 36세ㆍ세조ㆍ1417~1468ㆍ49세ㆍ재위 1455~1468)"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밖에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어린 국왕(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병권"을 장악하여 지목되었고, 결국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하여,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해되어,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①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11.10일(단종1ㆍ음10.10), "수양대군(당시 36세ㆍ세조ㆍ1417~1468ㆍ49세ㆍ재위 1455~1468)"이 "김종서ㆍ남지ㆍ황보인ㆍ세종의 여러 대군들(안평대군(3째 아들)등)"을 귀양 보내거나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단종"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 "계유정난"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된 "훈구(勳舊) 공신들"은 정치권력ㆍ경제적 부를 독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반대급부로 "사림(士林)"은 지방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15세기 이후 "성종" 때에는 중앙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것이 훗날 "기호학파(畿湖學派)ㆍ영남학파(嶺南學派)"로 나뉘고,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② "우암 송시열ㆍ동춘당 송준길" 가문과 관계
"계사(繼祀ㆍ송준길 7대조ㆍ송시열 8대조)"는 "판관"을 지냈으며, "김종흥(김종서의 동생)"의 딸과 혼인했으며,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공주"에 숨어 있던 집안이다. "순천 김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요년(遙年)ㆍ순년(順年)"을 두었다. "계사"의 자손이 "동춘당 송준길(요년(遙年)의 5대손)ㆍ우암 송시열(순년(順年)의 6대손)"이다.
3.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
"6진 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로서, "고려사ㆍ고려사절요"의 편찬책임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6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해서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ㆍ엄정하고, 밝은 문인ㆍ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ㆍ엄정한 면모는 "사헌부ㆍ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6진 개척" 당시 시련도 많았는데, 부관이었던 "판회령도호부사(判會寧導護府使) 박호문(朴好問)"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을 뻔 했으나, "세종"에 의해 곤장을 맞고, 끝이 난다."6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에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한 일 등은 그가 "고제(古制)ㆍ의례"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4대 왕(태종ㆍ세종ㆍ문종ㆍ단종)"을 모셔온 충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그의 위세는 웬만한 권신들도 잡지 못할 만큼이었으며, "의정부 서사제"를 명분으로 만천하를 호령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는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정사에 능한 원로대신에게 위탁하려는데, "황희"는 이미 은퇴를 했고, 90살의 고령이라, 그나마 70살의 "김종서"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황희"는 이때를 내다보고 "김종서"를 길렀으나, "정권을 무리하게 행사함"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 위에 좌상"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김종서"의 전횡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보인이 조상의 묘(墓)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갈 때 전송하는 자들이 구름과 같이 많았으나, 김종서가 갈 때보다는 많지 않았다"는 것과 "사위ㆍ아들"이 "특진 제도 때문에,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의 섭정은 "황보 인ㆍ정분" 등 정승들과 당시의 "6판서"들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3정승 체제"에 정승들도 견제를 받을 만큼, 누가 독단을 펼치기 어려운 정치구조로 됐을 만큼,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전횡ㆍ독단"으로 인해 그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 등은 전혀 없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쓴 "단종실록"에서도 그가 "서대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질 않는다. 이런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 "절도를 잘 지켰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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