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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남이 (세조ㆍ1441~1468)ㆍ남이의 옥(獄)사건ㆍ류자광이 제거

by 당대 제일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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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南怡ㆍ1441~1468ㆍ27세)"장군은 "세조"의 총애를 받고, 무예에 능하여, 27세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남이"의 승진과 세력 확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견제하던 "한명회ㆍ신숙주"등이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할 때,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전임되었다. 해임당한 것에 불만을 품던 중, 그가 지은 "시조 1수"를 문제 삼은 "유자광ㆍ한명회ㆍ신숙주" 등의 공격을 받고, 처형(거열형(車裂刑)ㆍ사지가 잘려나가는 형벌)되었다.

 

1. 남이 (南怡1441~1468향년 27)

조선 세조 때, 장군 (27세에 병조판서)시인척신ㆍ1468.10.24, "남이(南怡)의 옥()"사건이 발생한다. "예종"이 즉위한 지, 1달 보름 만에 "자광""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고변으로 시작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던 "남이()영의정 강순민서문효량변영수변자의오치권" 등이 "역모 죄"로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1818(순조18),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상소로 복권되었다1457(세조3), "무과""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지나, 조선왕조실록에"장원급제"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히려 "장원급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던 정황이 기술되어 있다.

출 생 : 조선 한성부       사 망 : 조선 한성부 (묘소-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시 호 : 충무(忠武)        활 동 : 병조판서겸사복장        경 력 이시애의 난 정벌여진족 정벌 (이시애의 난 버려진 함경도 호족인 이시애가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으로 일으킨 난)

사 인 : 처형 (거열형(車裂刑))        부 모 : (南份) 군수        : 부인 : 안동 권씨(좌의정 권람의 딸요절)재취부인(남이와 같이 처형): 2명   /  : 이덕(李德)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의 노비로 감

 : 탁문아(卓文兒기생출신 첩) 신운(申雲)의 노비로 감궁궐에서 베풀던 연회에도 나간 적이 있으므로, "흥양군 신운(申雲)""그녀를 집안 노비로 부릴 수 없다"하여 "관비"로 정속되었다. "신운" 아뢰기를, "전일에 하사받은 난신 남이의 첩 탁문아는 어전에서 정재(呈才)를 하던 자이므로, 신이 감히 가비(家婢)로써 부릴 수가 없습니다. 또 이 앞서 기생 월중매(月中梅)와 초요갱(楚腰䡖) 등이 난신의 첩들로서 모두 다 본역(本役)에 그대로 정속(定屬)되었으니, 청컨대 이를 개정(改定)하소서."하니, 의금부와 장례원에 전지하기를, "신운에게 하사해 준 기생 탁문아는 그대로 진해(鎭海) 관비(官婢)로 정속하라"하였다.

자 녀 : 1녀 남구을금(南求乙金) 한명회의 노비로 감  /   "남이"가 살던 집 (1468.11) "예종""류자광"에게 하사

가 족 : 조부 : 의산군 남휘(南暉)조모 : 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과 원경왕후의 4째 딸) /  장인 : 좌의정 권람(權擥)권람은 "한명회신숙주"의 동료이자, "계유정난세조반정"을 거사한 동지였다. 러나 "부인 권씨"가 일찍 죽고, "장인 권람"1465년에 일찍 죽었으므로, 를 지원해 인물이 없었다.

남이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이라고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날조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는 "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중종" , "조광조"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점이 감안되어,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으나, "기묘사화" "조광" 등이 숙청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류자"에 의한 2차례의 처절한 "사화""자광"에 대한 "사림파"의 평가가 극도로 절하됨으로써, "남이" 역모는 억울한 누명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반론으로는, "남이의 옥()"에 대해, "야사"에서는 "남이"를 시기한 "자광""예종"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남이의 시"를 과장모함하여, "남이" 죽게 했다고 하였으나, "실록"에 적힌 "국문과"에서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박시백"<조선왕조실록 : 예종성종실록>에서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남이"의 진술을 살펴봤을 때,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으며, 대신 그 "반란""한명회신숙주""세조"때 영화를 누린 대신들을 향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또한, 반란 동조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자광"을 잘못 봤으며, "자광""남이"를 모함한 것이 아닌 "남이의 역모"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변심하여 "고변"을 했다는 것이다.

남이의 시

후에 이 """봉기데모대"의 홍보물에 주로 이용되었다."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반탁시위""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장군 남이"가 지은 "" 선사하며, 격려하였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두만강 물은 말은 먹여 없애니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남이의 묘

분명히 묘소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존재하는데, "남이섬(강원도 춘천)"에 가보면, 남이장군의 묘소를 볼 수 있다. "역모를 꾀한다""자광"의 모함으로 "능지처참(거열형)"당한 "남이 장군"은 이곳 어딘가에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전설로 전해져오는 "돌무더기"가 있어, 이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고 치장한 게, 현재의 "남이 장군 묘" 하는데, 실제 "남이 장군"이 묻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반역을 꾀하였던 무리들을 섬멸했다는 "경북 영양의 남이포경기도 용인시 구성지역의 남씨 가문에 내려오는 아기장군"에 대한 얘기도 "남이 장군"과 얽혀있다.

2. 남이 (南怡)의 옥 ()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기에, "예종""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1468.10.24"예종"이 즉위한 지, 1달 보름 만에 "자광""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고변으로 시작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남이영의정 강순민서문효량변영수변자의오치권" 등이 "역모 죄"로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1468.10.24일 밤, "자광"이 입궐하여, "예종"에게 "의산군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이에 "예종"이 좀 더 소상히 고할 것을 요구하니, "자광""내병조에 입직해 있을 당시, 남이가 "세조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이 사이에 간신들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는 죽음을 당할 수 있으니, "세조"의 은혜에 보답해야하지 않겠는가? 재물을 탐하는 "김국광"과 불충한 "노사신"이 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하였으며," 오늘 저녁 "자광"이 찾아와 "강목"을 펼치고서는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광망이 희면, 해에 걸쳐 반역이 있다. 그러니 내가 미리 선수를 치려 한다"고 하였고, "이러한 일을 발설할 시, 한 쪽은 부인할 것이니, 발설한 쪽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고 고변하였다.

이에 "예종""체포대"를 보내고, "궐문 경비"를 강화시켰으며, 주요 종친과 대신들을 불러 들였다처음에 "남이"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금방 잡히고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국문""예종"이 직접 지휘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오늘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얘기하라.""예종"의 말에 "남이"

"이지정의 집에서 바둑을 두다가, 북방 인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민서의 집에서도 북방에 대한 얘기를 나눴으며, 류자광에 집에서는 "강목"을 꺼내 혜성 출현에 관한 부분을 봤다."라고 이야기하였다한 차례 고문이 가해지고, "자광"과 대질하였을 때도 "남이""역모 혐의"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고, "류자광이 불평을 가져 무고한 것이다."고 답하였다이때 증인으로 나온 류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 때를 이용하여, 왕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그러다가 같이 "국문"을 당하던 "민서"가 이야기하였는데,

"남이가 혜성 이야기를 하면서 "간신이 일어나면 내가 죽을 터인데, 염려가 된다."고 하였고, "간신이 누구냐" 물음에 "그 간신은 한명회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핀 연후에 아뢸 생각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순장(야간순찰)을 하고 있어, 바로 고하지 못했다."고 하였다이에 남이는 "한명회가 일찍이 적자를 세우는 일을 논하기에 반역을 꾀하고 있는 걸 알았다."라며, 민서의 진술을 기정사실화 하였다. 입시해 있던 "한명회"는 자신의 무죄를 이야기하였고, "예종""한명회"의 무죄 진술을 받아들였다이 후 다른 이들에게서 특별한 진술이 나오지 않다가, "국문"이 있은 지 이틀 뒤, "문효량"

"남이가 말하기를 "한명회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내가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이를 물리치려 한다."라고 하였기에, "이러한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강순이 나에게 난을 평정하는 일을 맡게 했다"고 하였다."라는 말에 "강순"도 같이 "국문"을 당하였으나, "강순"의 무고에 대한 호소를 받아들여 "예종""강순"을 풀어주었다.

"국문"을 당한 지 사흘 만에 "남이""묶은 몸을 풀어주시고, 술이나 한잔 주시면, 다 고하겠다."라고 말하기에,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남이"는 자신의 "역모"를 시인하였다시인하는 과정에서 "남이""강순과 더불어 "영순군 이부보성군춘양군" 1명을 임금으로 삼으로 ."고 하였고, 이를 완강히 부인하던 "강순"은 곤장을 맞고서는 역모를 시인하였지만, "신은 어려서부터 매를 맞은 적이 없어 매를 견딜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남이"에게 이를 따지자, "남이""당신은 이미 정승에 이르렀고, 나이도 들었기에 후회가 없겠지만, 나는 젊은 나이니, 진실로 애석하다."고 하였다"야사"에서 "남이""강순"을 끌어들인 것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함께 했던 "영의정 강순" 자신을 위한 변론 한마디를 하지 않은 것이 괘씸하여, 끌어들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당시 "강순""오위도총관"이었고, "영의정""구성군 이준"이었다.

"예종""역모 계획"을 물으니, "남이""창덕궁과 수강궁은 외부에서 알기 쉬운 까닭에 산릉제례를 나갈 때, 두 궁에 불을 질러, 경복궁으로 유인한 뒤, 거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옥사" 이후, "남이강순민서문효량" 등은 "능지처참(거열형)"에 처해진 뒤, 1주일 간 "효수"되었으며, "남이"의 지인들도 같이 죽음을 당하였다한편, "자광""정난공신 1"에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이"의 집을 상으로 받았다.

3. 구전 전설

축령산 전설

"축령산""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가평군 상면"경계에 있는 "축령산(886m)""전남 장성전북 고창" 경계에 있는 "축령산(620.5m)"이 있다"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축령산" 이름의 유래는 "남이"와 관련된 것이다"축령산"에는 "남이"가 어릴 적 무예를 닦았다는 "남이바위"가 있고, 정상에서 동쪽 방향으로 "남이섬(경기도 가평)"과 더불어, "남이 장군" 유래설이 근거가 빈약하지 않다.

"자광"의 거짓 고변을 들은 "예종"27살의 "남이""거열형(車裂刑사지가 잘려나가는 형벌)"로 참혹하게 죽이자, 이 지역 사람들이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남이"와 관련이 있는 이 산을 "축령산"으로 이름 지었다는 것인데,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남이 장군" 유래설이 더 친근감이 간다.

무속의 남이 장군

"박시백" 화백의 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이 장군"이 청년 시절에 처녀를 괴롭히는 악한 귀신을 보고 쫓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전설에 따라 "귀신지네" 등 다양한 상대를 한 것으로 전한다"무속"에서 "남이 장군""무당"이 섬기는 "장군 신 중 한 분"이다.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

"남이"에 관한 인물 전설로 "연려실기술청야만집(靑野謾集)대동기문(大東奇聞)"에 문헌자료가 전해지고 있으며, "구전 설화"도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문헌 자료는 순수 "설화"라기보다, 여러 문집에 소재하여 있는 "남이"에 관한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서 모두 같은 내용이다. 특기할 것은 "연려실기술" , "국조기사(國朝記事)"의 자료를 인용한 "남이의 결혼과정"은 현재 구전되는 "설화"와 같은 것으로 보아, 민간전승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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