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대 (1924.05~1945.10)"는 "경성부"에 있었던 대학으로 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한반도 최초의 대학기관으로, 일제 강점기 때, 민간인들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막으려고 1924년에 "일본제국"의 6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되었다.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광복된 후 "경성대학"으로 전환되었다가, "미군정"에 의해 폐교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설립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시설들을 활용하였다.
1. 경성 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ㆍ게이조 제국대학ㆍ경성제대ㆍ조다이(城大)
1923년, "이상재"를 대표로 하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의 발기 총회가 개최되어 거국적인 "민립대학 설치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는 한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1924년, 먼저 초기 중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2년제 예과(豫科)"만으로 개교하였다가, 1926년에 3년제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를 설치하여 총장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취임하였다.
1926.02월, "법문학부 교사"를, 5월에 청량리에 "예과 교사"를, 1927.01월에 "의학부 별관"과 8월에 "의학부 본관"을, 1928.06월에 "법문학부 본관"을 각각 준공하였으며, "총독부 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관하였다.
• 1924.05.02~1945.10.16 : 경성제국대학ㆍ1945.10.17~1946.08.22 : 경성대학(서울대학)→ 서울대학교로 통합
• 법문학부 (1926년) :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동숭정" (현,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자리)
• 의학부 (1926년) : 법문학부 맞은편인 "연건정" (현,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자리)
• 이공학부 (1943년)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현, 노원구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자리)ㆍ현재 이공학부 본관ㆍ교사는 "다산관ㆍ창학관"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
• 대학예과 (大學豫科ㆍ1943년) :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 (청량리 미주 상가 뒤편, 본관 건물이 남아있었으나, 2015.04월 철거)ㆍ합격생들은 학부에 진학하기 위해서, 대학예과(大學豫科)에서 2년(1934년 이후부터는 3년)간 공부해야 했다.
① 개설학부ㆍ학과
• 대학 예과 (大學豫科) : 문과ㆍ이과
< 학부 (본과) > • 의학부 • 이공학부 : 물리학ㆍ화학ㆍ토목공학ㆍ기계공학ㆍ전기공학ㆍ응용화학ㆍ채광야금
• 법문학부 : 법학과ㆍ철학과ㆍ사학과ㆍ문학과 (국어국문학 (일어일문학)ㆍ조선어ㆍ조선문학(국어국문학)ㆍ영어영문학ㆍ외국어외국문학)
② 일본 제국대학
1886 : 도쿄 제국대학 → 1897 : 교토 제국대학 → 1907 : 도호쿠 제국대학 → 1911 : 규슈 제국대학 → 1918 : 홋카이도 제국대학 → 1924 : 경성 제국대학 → 1928 : 다이호쿠 제국대학 → 1931 : 오사카 제국대학 → 1939 : 나고야 제국대학
2. 역대 조선인 교수ㆍ총장대행ㆍ유명 졸업생
① 역대 조선인 교수
•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 : 윤일선 (尹日善)ㆍ1928.03.30~ 1929.04.18
•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부 : 고영순 (高永珣)ㆍ1928.12.24~ 26
• 도쿄 제국대학 예과(문학부) : 윤태동 (尹泰東)ㆍ1934.07.25~ 1934.11.17
• 도쿄 제국대학 이공학부(지질학) : 김종원 (金鍾遠)ㆍ1945.07.17~ 10.16
② 총장 대행 : 백낙준 (1945.08.22~ 1946.08.22)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장
※ 백낙준 (白樂濬ㆍ1895~1985ㆍ향년 90세) : 문교부 장관 (2대)ㆍ무소속 참의원ㆍ교수 출신 정치가ㆍ교육자ㆍ국문학자ㆍ한글학자ㆍ기독교사학자ㆍ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60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 1948년 대한소년단 총재, 1950·1952년 제2대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1953년 기독교청년회(YMCA) 재단이사장, 1956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③ 유명 졸업생 : 1929 (77명) 중, 조선인 (19명)ㆍ1930 (126명) 중, 조선인 (38명)
김종열(金鍾烈ㆍ1900ㆍ정치인) ㆍ 최병주(崔丙柱ㆍ1903ㆍ정치인) ㆍ이재학(李在鶴ㆍ1904ㆍ정치인) ㆍ성낙서(成樂緖ㆍ1905ㆍ정치인)ㆍ유진오(兪鎭午ㆍ1906ㆍ정치인)ㆍ이강국(李康國ㆍ1906ㆍ정치인) ㆍ이주형(李周衡ㆍ1906ㆍ정치인) ㆍ이효석(李孝石ㆍ1907ㆍ소설가) ㆍ전봉덕(田鳳德ㆍ1910ㆍ변호사) ㆍ홍익표(洪翼杓ㆍ1910ㆍ정치인) ㆍ민복기(閔復基ㆍ1913ㆍ대법원장) ㆍ이도영(李道榮ㆍ1913ㆍ정치인) ㆍ이항녕(李恒寧ㆍ1915ㆍ법학자) ㆍ홍진기(洪璡基ㆍ1917ㆍ판사) ㆍ황산덕(黃山德ㆍ1917ㆍ법학자)ㆍ김증한(金曾漢ㆍ1920ㆍ법학자) ㆍ신현확(申鉉碻ㆍ1920ㆍ정치인) ㆍ이임학(李林學ㆍ1922ㆍ수학자)
3. 설립 진행 과정
191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대학설립을 통한 민족운동의 수준을 높이기로 하고, "조선총독부ㆍ일본내각"에 조선교육령의 개정과 대학설립인가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일본내각"에서는 1918년에 제정된 대학령에 의해 조선에도 대학을 설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학설립에 대해 민족주의진영과 협의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ㆍ일본내각"은 대학 설립을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일제가 대학설립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3ㆍ1운동"을 전후하여 대한제국 말기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의 적립금을 활용하여,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2년 개정교육령이 제정되어,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었고, 이에 따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모금책을 두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이에 당황한 "조선총독부ㆍ일본내각"은 서둘러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1923년 "조선에 관립대학을 설립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중심으로 한 "조선제국대학 창립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대학 설립의 법적 문제가 해결되는 사이, 일각에서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선제국대학"이라는 명칭이 "제국대학"이 아니라 "조선제국의 대학"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4월 말 조정안이 확정될 때, "조선제국대학"이라는 원래의 명칭이 "경성제국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경성제국대학"의 "예과교사·본부·법문학부 교사·의학부 교사"를 완공하는데 5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제국대학 령"에 의하면, 제국대학에 입학할 자는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로 한정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8개의 구제고등학교가 있었으며, 고등학교 입학자 대부분은 일본 내 제국대학들에 진학할 수 있었다. 반면에 조선에서 제국대학이 설립될 때는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선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2년제 "예과(豫科)"가 설치된 것이다.
"예과"는 "고등학교"와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제국대학 학부"에 입학할 때는 선발고사를 거쳐서 입학한 반면, 예과에서 본과(학부)로 진학할 때는 별도의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또, 고등학교가 3년제였던 반면 예과는 2년제였다. 고등학교와 "대학예과"의 이러한 차이는 "경성제국대학" 설립 준비 당시부터 기획된 것이었으며, 이는 일본의 제국대학보다 "조선의 제국대학"을 1단계 낮게 설정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실제로 "일본 홋카이도 제국대학"의 예과는 설치 당시부터 3년제였지만, "경성제 국대학과 다이호쿠 제국대학"은 2년제로 설치되었다. 한편, "2년제 예과"에서 3년 과정을 속성으로 지도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과 교원들에게 학업과중이 심했으며, 예과와 고등학교의 연한 불일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한 일본인들은 "대학예과"가 고등학교보다 1년의 수업연한이 짧다는 이유로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결국 1934년에 가서야 "일본의 대학예과"와 식민지 지역의 "대학예과"의 수학연한이 동일해졌다.
"예과"는 "문과ㆍ이과"를 분리하여 모집하였다. "이과 수료자"는 전원 "의학부"로 진학한 반면, "문과"의 경우는 학생선발에서부터 "법학계ㆍ문학계"로 나누어 학생을 선발했다. 그러나 문학계 학생들조차 "법학부 지행"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예외적인 비율로 허용되는 전과제도를 이용해 법학부로 진학하거나 아예 대학입시에 다시 응시해, "문과 법학계"로 재입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동안 문과에서 지망학부를 구별하지 않고 예과생을 모집하여, 학부 진학시에 희망학과를 선택하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문과생들의 편중된 "법학부 지망" 현상이 지속되자 기존의 제도로 환원하였다.
한편, 전과제도로 인해 문학계에서 학생 결손이 일어나는 경우 일종의 편입인 "선과(選科)"를 운영하였다. 이 "선과"를 통해 여자가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학부"는 설립당시에는 "법문학부ㆍ의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의 전문학교만으로는 고급인력을 충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학분야"의 대학수준의 학부 설립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런데 "법문학부"는 분야가 상이한 "법학부"와 철학·사학·문학과의 "문학부"가 병존하는 형태로, 대학 설립의 비용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학부 구성은 당시 조선 사회의 직업 구조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에는 고급인력을 수용할만한 근대적 경제부문의 폭이 좁았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은 관료로 진출할 기회가 비교적 많은 법학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보였고, 중등교육기관이 확대되면서 중등교원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동시에 대응하고자 "법학부ㆍ문학부"가 병존하는 "법문학부"가 설치된 것이다. 물론 다 합쳐도 학생수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1926년부터 "학부 진학"이 시작되었지만, "학부 교사"는 1927년에 완공될 예정으로 있었다. 때문에 대학본부는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자리 잡았고, "법문학부"는 목조 가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의학부 의화학 교실ㆍ병리해부학 교실"은 공사를 서둘러 진행해 학부 진학 직전에 완공할 수 있었다. "법문학부ㆍ의학부"를 비롯한 "경성제국대학"의 1년 경상비용(운영비용)은 50만 원선이었으며, 이는 조선의 모든 전문학교의 경상비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한편, "농학부·이학부·공학부"의 설치가 예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비용 상의 이유로 계속 설치가 유보되고 있었다.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조선에서의 군수공업이 발전해 기술인력이 필요해지자, 1938년에 "이공학부"의 설치가 확정되었다. 1940년 "예과"에 "이공학부 진학"을 위한 학급이 가설되었고, 1943년 "이공학부"가 가설되었다. "이공학부"가 가설되자, "경성제국대학"의 1년 경상비는 70만원에서 100만원 선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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