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尹善道ㆍ1587~1671ㆍ84세)"은 "남인"의 거두로 당쟁 속에 휘말려, 일생을 거의 "유배소"에서 지냈다. "시조"가 뛰어나서 "정철ㆍ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 (三大 詩歌人)"→ 성호 이익ㆍ채제공으로 전수되었다. 한글시가인 "오우가 (시조 6수ㆍ1642년 (인조20)ㆍ어부사시사(연시조, 1651년 (효종2))"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거부였으며, 최고의 풍류가 (녹우당 (사랑채ㆍ해남군 연동)ㆍ세연정(연못 정자ㆍ완도군 보길도))였다. 같은 "세자 시강원 사부"였던 "송시열 (宋時烈ㆍ1607~1689ㆍ82세)"은 정적이자, 경쟁자였다.
1. 윤선도 (尹善道ㆍ1587~1671ㆍ향년 84세)
조선 인조 때의 문신ㆍ시인ㆍ음악가ㆍ"인조(16대) 자제의 스승 : 소현세자(1남)ㆍ봉림대군(효종, 2남)ㆍ인평대군(3남)ㆍ현종(18대 효종1남)"의 사부ㆍ증손은 "공재 윤두서(화가)"이고, "윤두서"의 외손이 "다산 정약용"이다.(정약용의 외 5대 조부ㆍ정약용은 "정조" 때의 "남인"문신이자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명한 학자였다)ㆍ"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 출 생 : 한성부 • 사 망 :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 (은둔 생활지) • 사 인 : 노환(병사)
• 호 : 고산(孤山)ㆍ해옹(海翁) • 별 칭 : 제2의 무학(無學)ㆍ허목 : 경외하는 외우ㆍ이 시대의 의인으로 칭송
• 부 모 : 생부 : 윤유심(尹唯深ㆍ예빈시부정)ㆍ생모 : 순흥 안씨(좌의정 안현의 손녀) • 양부 : 윤유기(尹唯幾ㆍ강원도관찰사ㆍ백부)ㆍ양모 : 능성 구씨(현감 구운한의 딸) 백부이자 당숙인 "윤유기"가 아들이 없어, 친동생이었던 "윤유심"의 3째 아들 "윤선도"를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 처 : 남원 윤씨(16세에 결혼)ㆍ한양 조씨ㆍ첩 : 경주 설씨ㆍ무명씨(2명) 경주 설씨(첩)는 진도에 머무를 때 얻은 부인으로, 윤선도는 이곳에서 간척사업을 하였는데, 이곳 토착민의 부인이었다고 하며, "보길도"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 자 녀 : 아들 : 윤인미ㆍ요절ㆍ윤의미ㆍ윤예미 / 서자 : 윤순미ㆍ윤직미ㆍ윤학관 / 서자 : 윤학관(尹學官)ㆍ윤선도의 시문ㆍ작품을 정리하여 보존ㆍ후대에 전하였다. 장남 윤인미(尹仁美ㆍ진사)는 학식이 많기로 알려져 명성이 있었는데. 윤선도가 "삼수"에 유배중일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서인"들에 의해 연좌되어, "관직임용"에서 배척당한다. 이후 "금고형"을 선고받아,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하고, 13년간 금고 생활하였다.
• 가 족 : 증손자 : 공재 윤두서 (윤두서의 외손자가 정약용) 자화상으로 유명한 사람 / 외 5대손 : 정약용 ("정재원"은 본부인 "의령 남씨"에서 장남 "정약현"을 낳았고, 2째 부인인 윤두서의 딸 "해남 윤씨"에게서 "정약전ㆍ정약종ㆍ정약용" 3형제와 딸1명을 낳았다) / 사돈 : 유영경(柳永慶ㆍ소북의 영수)ㆍ유영길(柳永吉ㆍ강원도관찰사) / 후대 : 윤영선(제2대 국회의원)ㆍ윤관(전대법원장)
• 친 구 : 이해창ㆍ조경ㆍ허목ㆍ윤휴ㆍ홍무적ㆍ홍우원ㆍ하홍도ㆍ권해ㆍ이서우ㆍ정길보ㆍ나위소 등과 교유 / 당색이 다른 인물 : 이경여ㆍ윤선거ㆍ윤문거ㆍ윤원거 등과 교유
• 스 승 : 양부 "윤유기"는 한성의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윤선도"를 가르쳤으나, 스승의 이름은 미상이다. • 경 력 : 1606년(19세), 승보시(陞補試) 1등→ 1613년(광해군5ㆍ26세) 진사시에 1등 2위로 급제→ 1628년(인조6ㆍ41세)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급제 • 기 타 : 거문고(아양): 윤선도가 생전에 타던 "거문고"로, 자신의 거문고를 "아양"이라 이름 붙였다. 윤선언의 단령 : 조부 "윤의중"이 입던 옷으로, 생부 "윤유심"이 물려 입다가, 형 "윤선언"의 수의로 쓰임.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냈다.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ㆍ윤휴"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선봉장이었다. "서인 송시열"과 함께 "효종ㆍ현종"을 가르쳤으나, "송시열"은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ㆍ민회빈 강씨ㆍ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효종(17대)"과 "현종(18대)"의 "세자"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1613년(광해군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ㆍ영창대군의 옥사"등과 "북인"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광해군8ㆍ29세),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등의 횡포를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ㆍ경상도 기장"등으로 유배되었다가 8년 만에 풀려났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이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효종ㆍ17대ㆍ인조 2남)ㆍ인평대군(인조 3남)"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ㆍ형조정랑ㆍ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6)부터는 "세자 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인조 장남)"를 지도하였다.
1651년(효종2)가을, 벼슬을 버리고, "전남 해남군 보길도 부용동(甫吉島 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ㆍ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 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ㆍ시맥은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ㆍ채제공"에게로 이어졌고, 후대에 "남인"의 "학문ㆍ시맥(詩脈)"을 후대에 전하였다. 1667년(현종9), 나이 80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2. 인 물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던 그는 거침없는 발언과 형식ㆍ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같은 성격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평도 있다.
여러 지식에 통달하고 해박하여, "성리학ㆍ예학"은 물론 "풍수지리ㆍ관상ㆍ경사" 등의 지식에도 능통하였다. 의학 지식이 있어, 치료를 하기도 했으며,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허목"은 그의 "원칙론ㆍ강경함"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경신환국" 직후 쓴 "신도비문"에서, "준정(峻正)하여,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사곡한 예와 변변치 못한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서, 환난궁액(患難窮액)에 한결같고, 바른 도리 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만큼 정당하여, 비록 아홉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의를 봄이 밝고 죽음으로서 지켜서 바꾸지 않는 이가 아니고서야 능히 이같이 하였겠는가!"라고, 평가했다.
3. 의술인ㆍ내의원 제조
의학 지식이 있어, 치료를 하기도 했다. 의학과 관련하여, 최초로 실록에 나타난 시기는 "인조 10년"이다. 1657년(효종8) 가을, "인선왕후 장씨"의 병으로, "약제"를 잘 짓는다는 추천에 따라, 왕명으로 상경하여 "내의원 제조(提調)"로 의약제조에도 참여하였다. "인조ㆍ효종ㆍ현종"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의약을 위하여, "윤선도"를 불러들인 것으로 볼 때, 그가 의약부문에 있어서도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정적이었던 "송시열ㆍ원두표" 마저도 사람을 보내, 그에게 약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또한 집안에 "약포(藥鋪)"를 운영하여, 병든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록들도 있다. "녹우당"에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 썼던 "자가용 약장"이 현재도 전래되고 있다. 의술을 접하게 된 경위는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에서,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하였으나, 지식이 얕아 남들이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의학을 일종의 천한 기술로 여기던 당대의 시류와는 달리 직접 진료를 하고, 처방전을 지어주기도 했다.
4. 작 품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5가지면 그만이지 이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중략)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가운데 "오우가(五友歌)"는 "수(水)ㆍ석(石)ㆍ송(松)ㆍ죽(竹)ㆍ월(月)"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으며, "산중신곡"에서는 "영암군의 월출산"을 "선경(仙境)"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고산유고(孤山遺稿)" 실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4계절(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① 문집과 시조
단가ㆍ시조 75수를 창작하였다. 시가 중에는 "산중신곡(山中新曲)ㆍ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이 유명하다. "고산유고(시문집ㆍ정조15년에 특명으로 발간)"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ㆍ단가 75수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ㆍ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ㆍ기타 6수ㆍ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ㆍ몽천요(夢天謠) 5수ㆍ우후요(雨後謠) 1수" 순서로 실림.
<시 조>
• 1641(54세): 금쇄동기(金鎖洞記) • 1642(55세):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ㆍ만흥(漫興 6수)ㆍ조무요(朝霧謠 1수)ㆍ하우요(夏雨謠 2수)ㆍ일모요(日暮謠 1수)ㆍ야심요(夜深謠 1수)ㆍ기세탄(饑歲歎 1수)ㆍ오우가(五友歌 6수)
• 1645(58세):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 추야조(秋夜操 1수)ㆍ춘효음(春曉吟 1수) / 기타- 고금영(古琴詠,1수)ㆍ증반금(贈伴琴,1수)ㆍ초연곡(初筵曲,2수)ㆍ파연곡(罷宴曲,2수) • 1651(64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 전남 해남군 보길도 부용동 에서 지음 • 1652(65세): 몽천요삼장(夢天謠三章): 고산(孤山)에서 지음
<작 품> 이필행묘갈명
<처방전> 선창약 (癬瘡藥, 버짐을 없애는 약)ㆍ해수약 (咳嗽藥, 노인들의 해수병 치료약)
회충약(蛔蟲藥, 회충을 없애는 약)ㆍ복학신방(腹瘧神方, 어린애들의 자라 배를 다스리는 약)ㆍ우역신방(牛疫神方, 농촌지역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간단한 처방전)ㆍ오선주방(五仙酒方, 술ㆍ건강주)
<유고집>
고산선생유고집(孤山先生遺稿)ㆍ별집(別集)ㆍ약화제(藥和劑)ㆍ충헌공가훈ㆍ금쇄동기ㆍ병진소ㆍ고산소초ㆍ경모첩ㆍ장원급제 답안지ㆍ영모첩ㆍ고산서찰ㆍ금쇄동집고ㆍ은사첩ㆍ고산양자 예조입안 문서ㆍ증이조판서 윤공시장
② 오우가 (五友歌): 1642년(인조20),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면서, "윤선도"가 지은 시조 6수
"조윤제"가 "시조가 이까지 오면, 갈 곳까지 다 갔다는 감이 있다"라고 극찬했던 시조로, "윤선도"의 시조 가운데서도 "백미"로 평가된다. "고산유고(孤山遺稿)" (권6 하권)에 실려 있는 "산중신곡(山中新曲)의 1~6번째 수로 기록되어 전한다. 자연관찰을 통해 의미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과 연결해 생각하도록 언어화했다. 이 노래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덕목보다는 특별히 "신하"로서의 도리, 즉 "충"의 개념이 우선시되고 있다. "충"의 "지속성ㆍ불변성ㆍ강인성ㆍ절조성ㆍ불언성"을 자연물에 대입하여, "충"에 대한 의지와 정신을 대변했다.
1째 수는, 서사에 해당하고, "수(水)ㆍ석(石)ㆍ송(松)ㆍ죽(竹)ㆍ월(月)"에 대한 각 1수씩으로 되어 있다. 2째 수는, "구름·바람"과 비교하여, "물의 그침 없음"을 노래했다. 3째 수는, "꽃·풀"과 비교하여, "바위의 변함없음"을 노래했다. 4째 수는, "꽃 피고 잎 지는 나무"와 달리, 눈서리를 모르는 "소나무의 뿌리 깊음"을 노래했다. 5째 수는. "나무도 풀도 아니면서", 곧고 속이 비어 있는 "대나무의 푸르름"을 노래했다. 6째 수는. 작지만, 밤에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춰주는 "달의 말 없음"을 노래했다.
③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의 연시조로, 자연에서의 어부생활을 4계절로 나누어 표현
1651년(효종2), "윤선도"가 지은 연시조로,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 65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전남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 몸이 되어, "강호한정"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4계절(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고려후기"의 "어부가"를 이어받아, 다시 창작한 것으로, "이현보의 어부사"나 그 밖의 "어부가"에 속하는 노래는 "한시"에 "여음"이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래는 순 "우리말"로 새롭게 썼다.
④ 보길도 (甫吉島): "전남 완도" 남서쪽에 있는 "노화도"에서 약 3.8㎞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노화도ㆍ소안도"를 비롯한 큰 섬과 "예작도ㆍ장사도"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섬의 명칭은 "섬 내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뜻 (十用十一口 → 甫吉)으로 "보길도"라 했다. 4계절 어촌의 풍경과 어부의 생활을 읊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춘하추동에 따라 10수씩, 총 40수로 되어 있는데,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어부사시사"의 산실이다.
1637년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위해 "제주도"로 향하던 중, 이곳의 자연 경관에 매료돼, 13년을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가 연회를 즐겼던 "세연정ㆍ세연지",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한 "낙서재", 사색의 터전이었던 "동천석실"등이 현존하고 있으며, 섬에는 윤선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⑤ 세연정 (洗然亭): 연못 정자
"보길도"에 만든 "세연정"의 경치는 조선시대 지어진 정원 중, 으뜸으로 꼽힌다.
⑥ 녹우당 (綠雨堂): 사랑채
태어나서 자란 "녹우당"은 후일의 "해남 윤씨"의 종가이기도 하다. 고조부 "윤효정"(호 : 어초은(漁樵隱)ㆍ1476~1543)이 "해남군 연동(蓮洞)"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C 중엽의 건물이다. "효종"은 어린 시절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선물로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효종"이 선물한 "경기도 수원 집"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해상으로 일일이 "해남"으로 운송하여, 재건축하여, "사랑채"로 삼고, "녹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 241호)이 근처에 있다.
⑦ 광양 추동 유배지
1665년(78세), "유배 령"을 받고, "전남 광양군 추동마을"로 유배를 와서, 2년 4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윤선도"가 남긴 문집 "고산유고"를 이 곳에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았던 옛 집터와 울창한 대나무 숲과 물이 흐르는 개울, 400~500년 된 노송이 현재까지 있다.
5. 작품의 평가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4계절 어촌의 풍경과 어부의 생활을 읊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조선 시가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가 뛰어나서 "정철ㆍ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불린다. "이덕일(역사학자)"는 "자연을 소재로 한 것보다는 현실 정치에서의 우울함을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파 홍우원"은 "앞사람을 이어받지 않고 새로운 경지를 세웠다.(不襲踏前人 創立新意)"고 평하여, 창의성을 높이 샀으며, "한시"에 대해서도 "검옹지림(黔翁志林)"에서 "고산 윤선도의 시는 옛 사람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틀을 잡아 마음대로 짓고, 뛰어나서 남들이 높이고, 두려워하게 했다.(尹孤山善道詩 不依古人 自出機?放恣卓詭 有使人可敬而畏者)"라고 평하였다. 영조 때 가객(歌客)인 "김수장)"은 "해동가요(海東歌謠)"에서 "고산의 노래는 때 묻지 않아 맑고 높으므로, 우리로서는 올라갈 수 없는 만장봉이다.(然此翁歌法 脫垢淸高 吾觀之此 則難登萬丈之峯)"라고, 청고한 시격(詩格)을 칭송하고, "고산어부사발문"을 찬하였다.
"정인보(鄭寅普ㆍ독립운동가)"는 "정송강(鄭松江)과 국문학(國文學)"이란 글에서, "고산은 대개 담아의 일경으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에 배합되는데 좋다. 고산의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우유(優遊)하는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래 맑게 난다" 같은 것은, 호남 산수간의 야경(夜景)을 귀신같이 그려 놓았다."라고 말하였다. "조윤제"는 "한국시가사강(韓國時歌史綱)"에서 "고산은 다른 작가에 특출하여, 실로 시가로 인하여 조선어의 미를 발견하고, 그를 그의 시가상에 직접 시험하여 보았다."고 평하여, 윤선도가 시조문학의 대가임을 극찬하였다.
6. 사상과 신념
① 효종 정통론- 왕사부동례 (효종의 스승)
윤선도는 "정구ㆍ허목ㆍ윤휴"와 함께, "왕사부동례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조"의 왕통을 이은 것은 "효종"이므로, "효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왕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제2장자로서 장남과 같다"고 보았는데, 그에 의하면, "서자"는 "첩의 자녀"에게만 "서자"라 부르는 것이고, "정실자녀"에게는 "중자"라고 해도 "서자"라 부르지는 않는다고 봤다.
② 효종 북벌론에 대한 비판
"효종" 즉위 후의 "북벌론"에 비판적이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한 뒤, "송시열ㆍ송준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송시열ㆍ송준길"은 오랑캐를 정벌하여, 복수하자고 "효종"의 뜻을 움직여 드디어 "북벌"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그는 민생이 중함을 들어,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다시 상소하여 "몸을 닦고 도를 닦아, 왕손을 너그럽게 용서하여야 된다."는 일을 "현도"에 올렸으나, "감사 이시만(監司 李時萬)"이 올리지 않았다. "감사 이시만"이 그의 상소를 올리지 않자, 그는 아들 "윤인미"를 시켜, 직접 "승정원"에 상소를 올리게 하니, "승정원"이 기각하려다가, "효종"이 올리라 하여, 얼마 뒤에 올렸다. "효종"이 마음을 기울여 답하기를, "직접 당언(바른말)을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는 "북벌론"을 "불필요한 소모 또는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명분"으로 간주하였다.
③ 서자에 대한 평등 대우
그에게는 여러 "서자ㆍ서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경주 설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 중에 "윤학관"을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서얼"이 차별받는 신분사회였지만, 그는 무조건 "서얼"을 차별하려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적서차별"이 존재하던 조선사회에서 "서자"에게 애정을 쏟는 경우는 희귀하고,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서자"에 대한 애정은 애정이었으나, 신분관계는 명확하게 하였다.
그는 "보길도"에서 임종시에도 "윤학관"이 시종토록 하였다고 한다. "첩"의 자식도 같은 자식이라 사랑함에는 다를 바 없었다고 하지만, "선조"의 유업은 "서손"에게 함부로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하여, 신분사회의 한계는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인연 때문인지, "서자 윤학관"의 무덤은 "윤선도"의 무덤이 있는 "금쇄동"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들어 있다.
7. 예송논쟁과 갈등
일찍부터 "서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인조"의 신임을 얻어, "세자시강원"에서 "송시열"을 만난다. 이때 그는 역시 "대군사부"로 보임된 "송시열"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의 정적이 된다. "정여립의 난" 때, 죽음을 당한 "이발"은 "윤의중"의 사위였다. 이런 가족관계 외에도 "송시열ㆍ서인정권"에 의해, "윤선도"의 정치적 야망이 번번이 좌절된 것도 한몫을 했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광해군" 때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유배를 간 일이 있었다. "이이첨"을 탄핵했던 "송시열"은 "이이첨"이 실각한 후, 그 공로를 높이 인정받았으나, 윤선도는 "유명수(柳命壽)"의 사주를 받고 한 일이라고 깎아내려져, 공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그의 기개를 높이 사는 상소들이 올라왔지만, 그가 "유명수"등의 사주를 받았다는 비방도 계속 제기되자 그는 실망하였고, 그 뒤 "찰방"등의 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또한 윤선도는 "송시열"처럼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의 사부로 "효종"의 스승이었다. "세자"가 임금으로 즉위하면, "세자시강원 사부"는 중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는 중용되지 못했다. 윤선도는 그 이유가 바로 "서인 송시열"의 반대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1차 예송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받고, "부호군"으로 체임되었다가, 1660.06월 "함경남도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송시열"을 죽이려다가, 집권당인 "서인"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게 된 "윤선도"는 오히려 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가, "서인"들은 "윤선도"가 "송시열"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여, 그가 어진 이를 모함한다며 심하게 공격하였으며, 역으로 "윤선도"를 사형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인"들의 계속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효종"과 "현종"의 "왕자ㆍ세자시절" 사부의 한사람이었으므로, 사형은 모면하였다. "윤선도"가 "효종ㆍ현종"의 사부가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윤선도 등은 "예송논쟁" 때, "송시열ㆍ송준길"이 "효종"에게 "소현세자 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강력하게 주청했다는 점을 걸고넘어지며, 그들이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생각했다"고 공격했고, "윤휴"등은 이에 동조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인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었고, "세자빈"을 구명했다가 희생된 "김홍욱"을 "의를 위해 희생된 선비"라고 확신하던 "송시열ㆍ송준길"은 "윤선도ㆍ윤휴"와 "남인"들의 정치공세에 크게 분노했다.
집권 "서인ㆍ삼사"의 공격을 한 몸에 받는 "윤선도"는 죽음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윤선도"를 구명하고 나선 인물은 "우윤 권시"였다. 그는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옹호했다. "자의대비마마의 복제가 3년이 맞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송시열ㆍ송준길 등이 이를 잘못 해석한 것은 유감된 일입니다. 온 세상이 이것이 잘못임을 알지만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윤선도가 말한 것입니다. 다만 선도의 말이 간악하나, 그 감언한 용기는 취할 만한 점이고, 또 선왕의 사부이니 경솔하게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삼사"가 일제히 나서서, "권시"를 공격했고, "권시"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고 말았다. 이때 "서인 유계(兪棨)"가 그가 올린 상소를 불태워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의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서인"이 장악한 "삼사"등에서는 "윤선도"를 국문하자 하거나, 죽이자고 하였다. 그를 "반좌율"을 물어, 극형에 처해야 된다는 "서인 성균관 유생"들과 선비들의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윤선도"의 논리가 "송시열"등의 "서인"들에 대한 모함이라는 탄핵에 의해, "윤선도"는 귀양 조치되고, "현종"은 더 이상 "예론"을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함으로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남인"들은 승복하지 않았고, "윤휴"등은 반발했다. 또한 그의 문인 "정유악(鄭維岳)"은 그가 죽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8. 개념 : 예송 논쟁 (禮訟 論爭)
1659년(효종10), 5월초부터 과로로 인하여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효종(孝宗ㆍ1619~1659.06.23ㆍ재위 : 1649~1659ㆍ17대 임금ㆍ인조와 인열왕후 2째 아들)"은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신하들에게 물었고, "효종"이 동의하여 침을 맞게 된다. 그런데 "어의 신가귀"의 진료를 받던 중, 실수로 침을 잘못 놓게 되어 출혈이 발생한다. 출혈을 멈추려 갖은 시도를 하였으나 오히려 출혈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당일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또한 "효종"에게 시침하였던 어의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한다. "어의 신가귀"는 "현종 대"에 교형에 처해졌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뜻밖의 긴 논쟁이 일어난다. "인조"의 1째 부인 "인열왕후 한씨"이 죽고, 우여곡절 끝에 재혼을 하였으나, 2번째 왕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ㆍ인조 2번째 왕비ㆍ효종의 계모)"는 "인조"보다 무려 29살이나 어렸다.
① 1차 논쟁 : 효종의 사망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ㆍ인조 2번째 왕비ㆍ효종의 계모)"가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할지가 문제였다. 경우에 따라 입는 기간이 달라진다. 이유는 "효종"의 어머니가 "자의대비"이나, 그녀는 "효종"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의대비"처럼 "왕의 새어머니"가 상복을 입게 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입어야할지 정하지 못했다. "현종"은 신하들에게 질문했다.
• 송시열의 주장 : 1년만 상복을 입히자고 했다. 그 이유는 "자의대비"는 "효종"의 친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 정태화의 주장 : 영의정 "정태화"는 "자의대비"가 "효종"의 어머니는 맞으니까, 원래 관습대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1차 논쟁의 결과 : "송시열"의 주장을 따라,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었다.
② 2차 논쟁 : 인선왕후 (효종 왕비ㆍ현종 모친)의 사망
1674년(현종15), "인선왕후(효종 왕비ㆍ현종 모친)"이 죽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다시 "예송논쟁(2차)"가 일어났다. "서인(송시열)"이 "기년복(1년 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자, "남인"이 "대공복(9개월 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 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1년 복)"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했다.(→갑인예송) "현종"은 이후, "2번 다시 예송과 관련한 논쟁을 벌일 시에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고, "숙종"이 "경신환국"을 일으키기 전까지, 6년간 "남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송시열"은 "숙종(19대 왕)"에 의해 파직되고 만다.
• 문제점 : 시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하나? • 송시열의 주장 : 9개월만 상복을 입히자고 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는 정치적 위기까지 겪는다.
• 2차 논쟁의 결과 : "송시열"의 "현종" 독살설? 논쟁이 끝날 때 쯤, "현종"이 승하하는데, "송시열"의 독살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돈다. "현종"도 "송시열"의 주장에 반대했으니,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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