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呂運亨ㆍ1886~1947.07.19ㆍ61세)"은 "민족주의자ㆍ자유주의자ㆍ민주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것으로, "좌파와 민중 세력의 대변자"라고 생각된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기" 시기, 그는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
1. 여운형 (呂運亨ㆍ1886~1947.07.19ㆍ향년 61세)
1946.03.0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를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상 후보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언론인 : 동아일보 상해주재 촉탁통신원ㆍ타스통신사 직원ㆍ중외일보 운영ㆍ조선중앙일보사 (조선일보ㆍ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사장 • 교육자 : 초당의숙(강릉)의 교사ㆍ광동(光東)학교 설립 • 체육인 :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회장 • 기독교인 : 승동교회(민중교회ㆍ종로구 인사동) 전도사
독립운동가(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ㆍ외무부 차장)ㆍ"2ㆍ8 독립 선언"에 영향ㆍ안창호의 "개조파"지지ㆍ국민대표회의(1923)때, "안창호ㆍ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ㆍ"중국 국민당"에 가담ㆍ비밀지하 독립운동 단체 "건국동맹ㆍ농민동맹" 결성
고려공산당 창당(이동휘)ㆍ"볼세비키 당" 참여(레닌 면담)ㆍ신한청년당 당수ㆍ조선인민당 창당ㆍ건국준비위원회(안재홍ㆍ박헌영)/조선 인민공화국 결성ㆍ근로인민당 창당(남로당 박헌영과 갈등으로 창당)ㆍ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1945.08)ㆍ조선 인민공화국 부주석 (1945.09~1946.02)ㆍ"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 전개 (김규식ㆍ안재홍 등)ㆍ"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 "김원봉"을 "좌파 진영으로 영입
• 출 생 : 경기도 양평 • 사 망 : 서울 혜화동 로터리 (묘소 : 강북구 우이동)ㆍ영결식 : 인민장 (광화문 근로인민당사 앞), 약 60여만 명 추모인파(광복 이후 최다 인파가 모임) • 사 인 : 암살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5명)
• 호 : 몽양 (夢陽) • 별 칭 : 감초사장 (인기 많은 공인으로, 각종 행사의 연사를 하는 "전임 조선중앙일보" 사장)
• 신 념 : 혈농어수 (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분즉도합필립 (分卽倒合必立): 나뉘면 곧 쓰러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
• 학 력 : 배재학당 → 흥화학교 → 우무학당 (郵務學堂ㆍ국가에서 운영하던 통신원 부설) / 평양신학교(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 금릉대학교(중국 난징)에서 영문학(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
• 종 교 : 동학(천도교)→ 기독교 • 처 : 유씨 (柳氏ㆍ?~1903)ㆍ진상하 (陳相夏ㆍ1885~ ?)
• 자 녀 : 여연구(2째 딸)ㆍ여원구(3째 딸)ㆍ여순구(막내 딸)ㆍ여붕구(막내아들ㆍ1991년 사망)가 월북했다. 여연구ㆍ여원구 : 북조선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여원구 : 2002.08.14일 한국에 8ㆍ15공동행사 민족통일대회에 북한측 대표단 단원으로 참여ㆍ방문
• 가 족 : 동생- 여운홍 (독립운동가ㆍ국회의원) / 사촌동생- 여운일 (3ㆍ1운동이나 배일사상 관련ㆍ1919년 총독부에 의해 인천 덕적도에 1년간 감금)
• 수 상 : 1990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 2005 : 건국공로훈장 대통령 장 (2급 훈장ㆍ노무현) / 2008 :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1급 훈장ㆍ노무현 퇴임직전)
구한 말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ㆍ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후일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국내에 압송된 뒤 수감되자, "조만식ㆍ이광수"등과 함께 수시로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으며, 또한, "안창호"의 말년에는 끝까지 "조만식"과 함께 곁에 있었다.
1946.02.9일에 여운형은 비밀리에 농부로 변장하고, "3ㆍ8선"을 넘어 이북으로 건너갔다. 1946.02.09~ 11일까지 북한의 인사들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조만식의 석방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 북한의 저명인사들도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조만식은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1908년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후,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들을 불살라 집안의 모든 노비를 해방시켰는데. 동생 여운홍은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노비들이 해방되고 나서 나중에 여운형한테 반말을 하였는데, 그는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외교관으로는 중국에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여, 1919년 3ㆍ1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했으며, 직접 일본을 찾아 담판을 짓기도 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등을 지냈다. 한국노병회ㆍ시사책진회ㆍ중한호조사 결성에도 참여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과 함께 개조파로 활동했으나, 임정을 떠났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활동하였다.
1929.0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중국 상하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야구경기 관람 중, 영국경찰의 협력을 받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다.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져서, 여운형의 한쪽 귀 고막이 상해,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 1930.04월 일제 법정에 의해 3년 징역으로 최종 확정되었고, 1930.06월 상고심에서도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여 독방생활을 하였고, 몸무게가 80kg대에서 60kg대로 줄었다. 특히 수감생활 중, "치질"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1932.07.26일, 만기 4개월을 앞두고,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 되었다.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20년대 초중반, 중국 상하이에서 "동아일보"의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과 "타스 통신사" 직원으로 지냈으며, 국내에서는 동생 "여운홍"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1933~ 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지냈다. 체육인으로는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과 미군정기 "군정청 체육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4년부터는 비밀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결성하였고, 농민동맹에 관여하였다.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는 좌파와 민중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1945.08.14일,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에게서 일본의 패전소식과 함께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서울 필동)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어서 총독부 정무총감은 여운형과 교섭하여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해 달라"고 하자, 여운형은 5개항 보장 조건을 전제로 수락하였다.
1945.08.15일 아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서울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에서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 받았다. "건국준비위원회(박헌영(좌익계)/안재홍(우익계) 참여ㆍ건국동맹이 기초ㆍ지역 지부가 인민위원회)"는 "치안권ㆍ행정권"을 담당했다. 그러나 "건준"은 곧 "박헌영"의 공산주의계 인사들의 좌경화로 본질적인 목적과 정치성향이 변질되었고, 우익계열 인사인 "안재홍"은 이에 반발하여 "건준"에서 탈퇴했다. 그리하여 09.06일에 "전국 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박헌영"이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변모시켰다.
1945.09.07일 여운형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출된 이승만과 함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46.12.28~ 1947.01.08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1946년부터는 "김규식ㆍ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ㆍ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10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07.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5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2. 당대의 평가
"소련 군정문서 :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1946.03.22일자 내용(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사회여론조사부는 각지로 자신의 대표 20명을 파견하여, 실업자ㆍ상인ㆍ소자산가들과 면담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ㆍ여운형ㆍ박헌영ㆍ조만식ㆍ김두봉ㆍ김일성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에서, "대다수는 여운형ㆍ조만식을 지지하였고, 이승만ㆍ김규식을 지지한 사람은 2명이었다"고 적혀있다.
1945.10.10~ 11.0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33%가 여운형을 지목하였다.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78명이 여운형을 지목하였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95표를 얻어 1위였다.
1946.07월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 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89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1947.0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 주요 시내거리에서 이승만과 여운형 두 사람에 대한 지지 모의투표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1000표(이승만) 대 900표(여운형)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
3. 조선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방문
① 1945.08.05일, 조선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의 집을 방문한다.
※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총독"의 아래 2인자(총리)로, "군사통수권"을 제외한 행정ㆍ사법을 통괄하던 직책 (엔도 류사쿠 (1886~1963ㆍ정무총감 근무 1944.07~1945.10) : 일본 무사시노 은행의 설립자ㆍ정치가ㆍ변호사)
일제 강점기, "여운형"은 1944년 "조선 건국 동맹"을 만든다. "여운형"은 자신이 만든 "조선건국동맹"이 "일본"에게 들켰나 싶어 놀랐다.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 여운형 : 나를 찾아온 용건은 무엇인가? • 엔도 류사쿠 : 일본은 미국에 항복하고, 조선은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는 60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는데,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일본인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 여운형 : 난 일본제국의 식민통치가 싫었을 뿐이지, 일본인 개개인들을 미워한 것은 아니다. 너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대신 나도 요구 조건이 있다. < 여운형의 협상조건 > • 정치범ㆍ경제범을 즉시 석방 • 경성의 식량 3개월 치 확보 •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 학생ㆍ청년의 훈련과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말 것
당시 "태평양 전쟁"을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무장한 "일본군" 32만 명 역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반도로 집결하고 있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조선인"의 폭동도 무서웠지만, 반대로 "조선" 입장에서는 패전한 "일본군"이 마지막이라며 한반도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가장 무서운 군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패전군"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거리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할복하는 "일본군"도 많았기에 거리는 흉흉했다.
어떤 이는 "여운형"이 "엔도 류사쿠"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나쁘다고 할 수도 있는데, 무장한 일본군 32만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기에, 패망한 "일본군"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조선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므로 무사히 일본인을 본국으로 보내주는 것이 오히려 조선에게도 안전했던 것이다.
② 독립할 것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고, 1945.08.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만든다.
1945.09월,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도 정부를 대신해야 할 단체가 있어야 "미국"과 협상할 때,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건준"을 국가적인 성격을 가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개편을 한다. "여운형"은 "인공 주석"으로 "이승만"을 초대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한다. "건준"은 한반도 전역에 치안ㆍ행정ㆍ교육 자치를 위한 지방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그 후, "북한"에는 "소련"이 들어오고, "남한"에는 "미국"이 들어온다.
처음엔 좌우 관계없는 인사들이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단체들이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좌익계열 인사들"이 점점 늘어났다. "소련"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지만, "미국"은 "인민위원회"를 "공산당"으로 간주하며, 이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소련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 :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건국은 조선인들의 능력에 달려있다 • "미국, 맥아더 포고문"의 내용 : 38선 밑으로는 미국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공용어는 "영어"를 써야 한다.
이 내용을 근거로 소련은 "해방군", 미국은 "점령군"이라고 학계는 해석했지만, 이 내용은 "이명박 정부" 때,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진다. 그렇다고 "소련"은 좋은 나라이고, "미국"은 나쁜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단체는 "시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자신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한반도는 "공산주의 국가"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고, "미국"은 조선인에게 "자본주의"를 알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이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을 경계한 이유는 "일본" 탓도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에게 한반도에 "사회주의 인사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4. 친 구
① 박헌영 (일생의 동지였다가, "좌우합작 문제ㆍ3당 합당문제"로, 서로 앙숙관계로 전환)
1946.08월초,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 앞으로 "3당 합당"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다. "조선공산당ㆍ남조선신민당ㆍ조선인민당"등 3당이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박헌영"과 "당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가 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운형은 "좌익정당 합당"보다는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고, "박헌영"은 이를 반대했다.
② 손기정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ㆍ1936.08.13일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진 기재 (최초)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 개최가 정해지고 "손기정"이 일본 측 대표 후보가 되자, 손기정은 "굳이 이 대회를 나가야 되느냐"고 여운형에게 물었다. 여운형은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하였고, 손기정은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하여 금메달을 딴다. 이 일은 각계 언론사들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 중 "조선중앙일보"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손기정 선수의 활약을 극찬하였고, 1936.08.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일장기"를 쓱싹 지운 사진을 실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인쇄기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장기가 지워진 건지 안 지워진 건지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쇄기의 품질이 좋았던 "동아일보"는 이걸 따라하여, 08.25일자 신문에 실었다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리게 되었고, "조선중앙일보"가 이를 먼저 시도했음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
5. "김구ㆍ 임시 정부"와의 관계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5년, 여운형이 "황해도"에 살던 "김구"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김구"와 상봉하게 해주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해서, 한때 일본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심문을 받은 적 있었을 만큼 인연이 두터웠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으로 지냈을 때와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지내던 시절에 여운형은 "김구"와 처음 만났다.
1919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약하여, 동생 "여운홍"과 함께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ㆍ외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왕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로 인해 임시정부가 "창조파ㆍ개조파" 세력으로 나뉠 때, 여운형은 "개조파 세력(안창호 중심)"으로 따랐으나, 임시정부의 파벌다툼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1945.08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김구"의 "충칭 임시정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국내에 있던 지하 비밀 독립단체였던 "건국동맹"과 비밀연락망을 두고 연락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해방직후, "김구"는 여운형을 매우 싫어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충칭 임시정부" 역시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충칭 임시정부만이 정통성"이라는 "임정법통론"노선에 여운형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즉, 여운형의 노선 생각은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중국 충칭에 있는 것 뿐 만이 아닌 해외 여러 곳(여운형은 미주ㆍ연해주ㆍ시베리아ㆍ만주 등지에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에 독립운동세력들이 있었고, 그러한 해외 독립운동가 세력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함께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구"를 비롯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눈으로는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권위를 부정하고 중대한 월권, 도전 행위다"라 여겨, 여운형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1945.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1진"이 망명길에서 돌아오자, 여운형은 "김구"를 상대로 "임정뿐만이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협력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자"고 설득하러 "서대문 경교장"을 방문했다. 여운형은 "경교장"에 들어가 옛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김구"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고, 수위에게 몸수색을 지시하여, 여운형은 끌려나가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다시는 "김구"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6. "임시정부 법통성" 논란
1945.12월 환국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법통성"을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허헌"과 함께 "임시정부의 법통성" 주장은 옳지 않다는 시각을 피력하였다.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선공산당"과 달리 여운형은 좀 다른 각도에서 "중경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존재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임시정부의 법통 주장을 반박하였고, 임정 법통을 부정한 점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공격대상으로 찍히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장덕수"와의 대화에서 그는 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국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7. 암 살
미군정은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여운형을 중시하고 가까이 하였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1947.07.19일 아침, 여운형은 "김용중"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엔 죽음을 예견하는 내용이 있었다. "북조선에서 소련이 극좌파분자만을 선호한다고 하면, 여기 남조선에서 미국은 반대로 가려하고 있소. (중략) 극우파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을 방해받고 있소. (중략) 친애하는 김 선생.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 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소이다."
1947.07.19일, "IOC 가입" 축하기념으로 서울 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이 나타나서,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
① 암살 배후 논란
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4일 후인 1947.07.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0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ㆍ김흥성ㆍ김훈ㆍ김영성"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 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 전쟁 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지근(이필형)"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행방불명되었다. 소문으로 "한지근이 일본에 살아있다"는 증언이 있어 예전에 한겨레신문 기자가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고 한다.
② 암살 배후
이러한 암살 배후가 불분명한 가운데, 좌익세력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우익진영에서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암살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암살범의 도피를 방조한 점이나 범행 직후 우파 소행으로 보이는 암살 성공을 알리는 벽보가 서울 곳곳에 나붙은 정황 증거 등을 감안하면 "우익진영에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암살 당시 "여연구"는 모스크바 유학 중이라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으며, 당시 수사당국은 "좌파 한지근의 개인적인 범행이라고 밝혔으나, 당시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 시기, 여운형은 대중의 인기가 가장 높은 인물로 우익세력의 최대 정적이었다.
1947.06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다.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
③ 우익 계열에 의한 암살설
"이기형 시인(여운형 평전을 저술)"과 "강덕상 명예교수(재일 한국인 출신)"은 "이승만의 하수인 장택상ㆍ노덕술등 친일 경찰세력들이 배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기형은 "여운형 위시한 지도자를 훼방하고 때리고 가두는 작업에 친일잔재세력들과 보수 수구세력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서, "이들은 해방 이후 우익이라는 우산을 쓰고, 애국자로 둔갑했고, 건준을 망가뜨렸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에는 "군정 경찰ㆍ백의사"가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는데, 1947.07.19일, 암살 그날 경찰은 암살범을 쫓아가던 경호원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경호원을 체포하는 황당한 상황 연출을 보인 점과 수사 결과를 보도할 적에 "한지근 개인의 우발적인 범죄"라는 발표를 내었을 뿐, 암살 배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수사를 종결지었다. 평소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했을 때도, 경찰은 이를 방조하여 사실상 테러 행위를 조장하였던 것들을 미루어 볼 때, 이는 경찰의 후원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암살이었다.
여운형 암살공범 중 "김흥성ㆍ신동운"에 의하면, 권총을 건내 준 인물은 "김영철"이라고 한다.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겸 백의사 집행부장"이라고 한다. 김영철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서북청년회" 또는 그와 유사한 단체의 행동대장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당시 반공을 모토로 한 테러리스트 단체 주요 간부들과 서로 통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김영철"은 "백의사"와 서로 연이 닿는 사이로 여러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여운형 암살 공범들은 "임시정부 행동대원 김영철"하고 거래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김영철"이 "백의사" 계통하고 얼마나 가까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1985.08.31일 "백의사 부사령관 박경구"의 녹취록을 보면, "백의사ㆍ김영철"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김영철 씨는 원래 만주에 있을 때, 우리 중대장이야. 그런데 여기 나와서는 내가 (백의사)부사령관이고 그 양반(김영철)이 집행부장 했단 말이야. 본래 김영철 씨 권총 잘 쏩니다. 그래서 그 집행부장(김영철)이 하수자를 선정했을 것 아닙니까.(하략)"
백의사가 여운형 암살 계획한 이유에 대해서 "박경구"는 "여운형이 암살되기 전 여운형의 노선에 대해 탐문하기 위해 여운형을 찾아갔다"고 한다. (여운형에게) 물었더니 이 양반 말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과거 임시정부 시절은 이미 쓰레기이다. 지나갔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어. 그런데 청년들은 전부 이 사람을(따르고), 이야기하던 것을 그냥 그대로 염 선생(염동진)에게 보고했어. 그러니까 염 선생이 탁 치면서 "그렇다니까 틀림없다","그렇다면 저 놈 없애 되지 않겠느냐","그럽시다, 없앱시다."
당시에 여운형은 제2차 미소공위 성사를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는 "여운형이란 사람은 당시로서 기회주의자이고, 정치적 회색분자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한다면, 좌우가 협력해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이념을 가진 인물로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에서 더 이상 중도는 불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여운형 암살모의를 계획한 "극우파" 행동대원들은 "이승만-김구-한민당"을 왔다 갔다 했었으며, "백의사" 뿐만 아닌 극우테러 단체들은 여운형 암살로 거세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일처럼 범인들을 감싸 돌았다.
그리고 암살 시점이 그가 "소련"과 결별하고 "미군정"과 협력한 시점이었으며, 여운형에게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 총리 직을 제의하기 위해, 여운형과 교섭해야겠다."는 미군정 문서까지 발견된 것 등을 감안한다면 암살배후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노덕술" 등 군정경찰세력들이 극우 정치테러 단체들과 타협해서 사건을 축소, 무마하는데 일조한 암살배후로 보고 있다. 재일 한국인 원로 사학과 명예교수인 "강덕상" 역시 "이승만 일파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밖에 여운형의 외 조카인 철학자 "박찬기"는 "김구"를 지목했다.
④ "박헌영ㆍ김일성" 계열에 의한 암살설
이와 반대로 최근 2007년에 "이정식" 교수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의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고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 여운형의 둘째딸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박헌영 계열)"이라고 증언하였다. "이정식"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반면에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로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
또한 여운형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 "박갑동"에 의하면 "이 말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간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이러한 근거자료들은 미국 측의 자료에 있으며, 미국 측 자료에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 역시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이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7. 테러 일지
여운형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정치 테러를 12차례 겪었다. 1929년 중국에 있을 때 정치테러 2차례, 1945.08~ 1947.07월 암살되기까지 2년간 총 10차례 테러를 당했는데, 이는 정치 테러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이다.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대표적인 예가 이종형의 대동신문)까지 존재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광신자들은 찬탁으로 전환한 "박헌영"을 비롯해 "김규식ㆍ안재홍ㆍ여운형"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 여운형의 비서로 지낸 "여운각"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집(계동)도 폭파되고, 여운형이 여러 번 테러를 당했었고. 그리고 자녀들도 미행이 붙는 등 수상한 것도 여러 번 있었고, 하루도 정말 안심할 그런 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 1947.05월 무렵,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는데,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존 하지"는 1947.06.28일 무렵, "미군정"에서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 여운형이 1945.08.15일 광복 이후부터 당한 "정치 테러" 일지 >
1945.08.18 오전 1시경 : 서울 계동 자택 앞에서 괴한들에 의해 곤봉으로 피습 → 09.07 저녁 무렵 : 서울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다가 괴한들에게 밧줄로 묶임. 행인이 구제 → 12월 초순 : 백천 온천 여관에서 괴한에게 피습. 피습당하기 이전에 여관을 옮겨 무사
1946.01월 : 서울 창신동 친구 집을 괴한 5명이 습격,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중으로 위기 모면 → 04.18 오후 9시 : 서울 관수교에서 괴한들에 포위. 행인이 구출 → 05월 하순 : 서울 종로에서 괴한들에 포위. 격투 끝에 행인이 구출 → 07.17 : 서울 신당동 산에서 협박, 벼랑으로 낙하 → 10.07 저녁 무렵 : 서울 계동 자택 문전에서 납치. 나무에서 결박을 풀고 도피
1947.03.17 밤 : 서울 계동 자택에 침실 폭파. 외출상태였으므로 무사 → 04.03 :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 피습ㆍ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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