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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고사성어 • 고전 • 속담/삼국유사 (遺事)ㆍ일연

신라 22대 왕 "지증왕" : "마립간"에서 "왕"으로ㆍ배필을 찾아서~

by 당대 제일 2025.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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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三國遺事) :  지철로 왕 (智哲老 王)

"왕의 배필을 구하러 다니던 신하들이 모량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동 로수 아래에서 개 2마리가 큰북만 한 똥 1덩어리를 놓고,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중이었다"

1. "마립간"에서 "()"으로 : 칭호의 변화ㆍ왕권 강화

"지증왕 (智證王ㆍ신라 22대 왕ㆍ재위 : 500~514)"의 이름은 "지철로 (智哲老)지도로 (智度老)"이며, "신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왕권 강화를 통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특히,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왕"이라는 점과, 자신에게 맞는 "배필"을 찾아 나선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집니다.

"지증왕" 이전 신라의 군주들은 "거서간 (居西干)ㆍ차차웅 (次次雄)ㆍ이사금 (尼師今)ㆍ마립간 (麻立干)" 등 다양한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칭호들은 "신라" 초기, 연맹 왕국적 성격과 왕권의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줍니다. 특히 "마립간""말뚝"을 의미하며, ""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장 ()"이 모여 있는 형태로, 왕권이 이전보다 강화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하지만 "지증왕"은 즉위 4(503)"신라 (新羅)"라는 국호와 "()"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시 한반도 내 다른 국가인 "고구려ㆍ백제"와 동등한 위상을 확보하고, 중국식 "()"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국제 질서에 편입됨",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여러 부족장의 수장"이 아닌,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적 군주"로서의 위상을 상징했습니다.

"지증왕"은 신라의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 칭호를 사용하며, "순장 금지ㆍ우경 보급ㆍ우산국 정복" 등 혁혁한 업적을 남겨, "신라"를 고대 국가로 발전시킨 중요한 군주입니다. 그의 "배필 찾기 설화"는 왕의 비범한 신체적 특징과 함께, 당시 왕실의 혼인 문화, 그리고 왕권의 신성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설화는 "지증왕"이 단순히 역사적 업적을 남긴 인물을 넘어, 당시 신라인들에게 신비롭고 강력한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2. "지증왕"의 주요 업적 : 국가 기틀 다지기

이러한 업적들은 "지증왕" "신라"를 고대국가 체제로 정비하고, 훗날 "통일 신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순장 (殉葬) 금지

재위 6(505)"순장"을 금지했습니다. "순장"은 지배자가 죽으면, 노비ㆍ가축을 함께 묻던 야만적인 풍습으로, 이를 금지한 것은 "인명 존중 사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노동력 손실을 막아, 국가 발전에 기여하려는 합리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농업 진흥

"우경 (牛耕)", ""를 이용한 밭갈이를 보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신라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방 행정 구역 개편

"신라"의 행정 구역을 "주군현 (州郡縣)"으로 개편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지방호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우산국 정복

재위 13(512), "이사부 (異斯夫)"를 보내 "우산국 (于山國ㆍ현재, 울릉도ㆍ독도)" 정복했습니다. 이는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해상 지배력을 강화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동시 (東市) 설치

"수도 경주"의 동쪽에 시장인 "동시"를 설치하고, "동시전 (東市典)"을 두어 상업 활동을 관리했습니다. 이는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했습니다.

 

3. "지증왕"의 배필 찾기 설화 : 대인배적 면모

"지증왕"과 관련된 흥미로운 설화는 바로 그의 배필 찾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이 설화는 "지증왕"의 비범한 신체적 특징과 당시 왕실의 혼인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왕의 비범한 신체

"지증왕"은 키가 매우 컸고, 특히 음경의 길이가 15(45cm)에 달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지증왕의 음경이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의 남다른 신체적 특징을 과장하여, 그의 비범하고 신성한 면모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에게 맞는 배필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배필 탐색 지시

""은 자신에게 맞는 배필을 찾기 위해,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인물 탐색을 지시했습니다. 신하들은 여러 곳을 수소문했지만, ""의 비범한 신체에 맞는 여성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모로국 여인"의 등장

어느 날, 왕의 배필을 구하러 다니던 신하들이 "모량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동로수 (冬老樹)" 아래에서 개 2마리가 큰북만 한 크기의 똥 1덩어리를 놓고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중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그 광경을 이상히 여겨,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리 큰 변을 본 사람이 누구요?"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저건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몰래 숨어서 눈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개들이 저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신하들은 얼른 상공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과연 그 집 딸의 키가 75치나 되었습니다. 또한 처녀의 아버지가 밭을 갈다가 큰 지렁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들어 옮기려 하자, 지렁이가 너무 커서 밭두렁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때 딸이 나타나 "아버님, 제가 들어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지렁이를 쉽게 들어 옮겼습니다. 지렁이의 길이가 10(3M)나 되었다고 합니다신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의 음경이 15촌인데, 이 처녀라면 왕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고, ""은 크게 기뻐하며 그 처녀를 맞아 "왕후"로 삼았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연제부인 (延帝夫人)"입니다.

모로국 (莫盧國ㆍ마한에 속한 나라)마한 (馬韓): "기원전~6C까지 황해도 동남부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한반도 중서부 지역"

 

4. 설화의 의미ㆍ해석

""의 신성성ㆍ다산 상징

""의 비범한 신체적 특징은 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백성들에게 왕이 비범한 존재임을 각인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과장된 성기"는 생산력과 다산을 상징하여, ""의 통치가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혼인을 통한 왕권 강화

당시 "왕실의 혼인"은 단순한 개인적 결합이 아니라, 특정 "씨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왕권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이 설화는 "지증왕"이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강력하고 새로운 세력과 혼인을 맺어,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배층의 권위ㆍ위엄

설화 속 "지렁이"는 실제로 지렁이가 아니라, 당시 "지배층이 숭배했던 특정 동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혹은 "신성한 생명체ㆍ거대한 자연물"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처녀"가 그 거대한 "지렁이를 쉽게 들어 올렸다"는 것은 그녀 또한 ""과 같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보여주며, 이는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삼국유사"의 기록 특징

"삼국유사"는 정사 (正史)"삼국사기"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수록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ㆍ풍습ㆍ민간 신앙" 등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설화" 또한, 당시 왕실과 백성들이 가졌던 비합리적이고, 신성한 믿음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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