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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고사성어 • 고전 • 속담/삼국유사 (遺事)ㆍ일연

신라 48대 왕 "경문대왕" : 화랑 (花郞)에서 "왕(王)"이 되다.

by 당대 제일 2025.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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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三國遺事) :  48대 경문대왕 (景文大王)

"만약 2째 공주를 맞이한다면, 나는 낭이 보는 앞에서 죽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맏 공주를 맞이한다면 반드시 3가지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신중하게 처신하십시오."

1. "화랑 (花郞)" 출신으로 왕이 된 "경문대왕 (景文大王ㆍ본명 : 김응렴 (金膺廉))

"경문대왕 (景文大王)""신라 4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61~875년까지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화랑 출신"이라는 점과 관련된 흥미로운 설화들이 전해집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본명은 "김응렴 (金膺廉)"입니다. "희강왕 (43)"의 손자이자, "김계명 (金啓明)"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화랑 (花郞)"으로 활동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18세에 "국선 (國仙)"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화랑"이었다고 합니다.

"화랑""신라"의 청소년 수련 단체이자,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국가의 인재를 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화랑 출신"이라는 점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리더십덕망"을 인정받았으며, "신라 사회"의 주요 계층과 교류하며, 넓은 식견을 쌓았음을 보여줍니다.

"삼국유사 경문대왕 조"에는 그가 "화랑"으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헌안왕 (憲安王47)"이 그를 불러, "그대는 화랑으로서 사방을 유람했는데, 무슨 특별한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1번째 사람은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자였습니다. 2번째 사람은 권력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은 검소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래부터 귀하고 권력도 있지만 그 위력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화는 "헌안왕"이 후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물됨현명함"을 시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왕위 계승ㆍ"헌안왕"의 사위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로 고심했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선덕여왕진덕여왕"과 같은 여왕이 있었지만, "헌안왕"은 유교적 관점에서 "여왕"이 다시 나오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두 딸을 결혼시켜 사위를 통해, 왕위를 잇게 할 계획을 세웠고, 이때 "김응렴"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헌안왕"은 그에게 "두 딸이 있는데, 큰딸은 나이가 20세이고 작은딸은 19세이다. 어느 딸에게 장가들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부모는 "큰딸은 못생겼다는 소문이 있으니, 작은딸에게 장가드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흥륜사 (興輪寺)" 스님에게 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큰딸에게 장가드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헌안왕"에게 "제가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겠사오니,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답했고, "헌안왕"은 그에게 1째 딸인 "문의왕후 (文懿王后)"를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헌안왕"의 뒤를 이어 "경문대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 일화는 당시 왕위 계승 과정에서, 혼인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주며, "왕위 계승자"의 선택이 신중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3. 경문대왕"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주요 설화

"삼국유사 경문대왕 조"에는 그의 통치와 관련된 3가지 주요 설화가 실려 있어, "경문왕"의 인물됨과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밤마다 뱀들이 찾아오는 이야기

"경문왕"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수많은 뱀들이 그의 침실로 기어들어와, 그의 몸을 칭칭 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대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을 쫓아내려 했지만, 왕은 "과인은 뱀이 없으면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부디 뱀을 쫓지 말라"고 말하며, 뱀들을 쫓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설화는 "경문왕"이 뱀과 같은 "비이성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재생변화지혜"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길반란 세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경문왕"이 당시 신라 사회의 혼란 속에서 여러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품거나, 그들과 알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화랑들""현금포곡 (玄琴抱曲)" 등 향가 봉헌

"경문왕"의 치세에는 "국선 요원랑 (邀元郞)예흔랑 (譽昕郞)" 등의 화랑들이 "금란 (金蘭)"을 유람하며, 왕의 통치를 돕고 나라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3편의 노래를 지어 "심필 사지 (心弼 舍知)"를 시켜, "대구화상 (大矩和尙)"에게 보내 곡을 붙이게 했습니다. 3곡은 "현금포곡 (玄琴抱曲)대도곡 (大道曲)문군곡 (問群曲)"이었습니다. 이 노래들을 왕에게 올리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화랑들"이 단순한 무사 집단이 아니라, 국정 운영에 대한 관심과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왕의 치세를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 화랑들이 "왕권 강화"에 기여하고, 당시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 (驢耳說話)

이 설화는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뒤, "갑자기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졌다"는 내용입니다.

 

4. "경문대왕"의 역사적 평가

"경문대왕""화랑 출신"이라는 점과 그를 둘러싼 신비롭고 다채로운 설화들을 통해, "신라" 말기, "왕실의 불안정성귀족 세력의 동향그리고 민중의 인식" 등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인물입니다"경문대왕"의 재위 기간(861~ 875)"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이 점차 심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이어지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성장하며,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시기였습니다.

"경문왕"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왕권을 안정시키고 "불교"를 진흥하며, "국학 (國學)"에 행차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는 등 문화적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그의 치세에 대한 구체적인 업적이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주로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들을 통해 그의 인물됨이 그려집니다. 특히 그의 재위 기간은 "신라 멸망의 전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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