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가결되면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 "소추위원단 단장"으로 재판을 이끌게 된다. 이름부터가 정치인이 되기 위한 이름으로, "鄭淸來 : 나라 정ㆍ푸를 청ㆍ올 래ㆍ나라에 푸른색이 온다" 이다.
말 자체도 많고, 썰을 재밌게 잘 푼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도 2시간은 가져온 원고를 보지도 않고, 프리스타일로 발언했으며, 옛 보좌관의 말에 따르면,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찬 사람"이라고 한다.
1996년, "학원업"을 접고, 90년대 후반부터 여의도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 대사관저 폭탄 테러 사건"은 그가 정치인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경력으로 작용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케이스는 주로 "87 민주화 항쟁" 당시, 대학교 학생회장 출신이거나, 이후 출범한 "전대협 의장"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는 "학생회 경력"이 아닌, "미 대사관저 점거투옥 경력"을 발판으로 다선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1. 10남매 중 막내아들ㆍ부인도 10남매 중 막내
1965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44살 차이, 어머니와 43살 차이로 나이차가 매우 많이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현재는 5남매만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 1째 형ㆍ2째 형이 15살 차이가 나는데, 부모는 이 시기에 홍역으로 아이 5명을 잃었다고 한다. 부인(약사)도, "전남 강진"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큰조카보다 5달 늦게 태어난 막내삼촌이 되었고, 어머니는 당시 그를 낙태하려고 대전시의 산부인과를 2번이나 갔지만, 뱃속 정청래의 태동이 너무 활발했던 탓에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낳았다고 한다.
"대전 보문고교"를 졸업 후, 대입에 낙방하고 상경하여, 재수한 후, 1985년 "건국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재수 때 경험이 나중에 학원을 차렸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학년때 과대표에 출마하며, "나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이후 운동권 활동에 투신하여, "전대협 산하 서총련"에서 활동했다. 1987.06월, "6월 항쟁"에 참가했다가 짧게 "구류"를 살았다.
1988.09월, 새벽 2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을지로의 이름도 위치도 모르는 호텔방으로 끌려가 팬티바람에 물이 묻은 손수건으로 눈이 가려진 채, 4시간 동안 물고문ㆍ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한다. "내가 정말로 12ㆍ3 내란 사태에서 계엄군의 체포 명단에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못했다"면서, 24세 시절에 "안기부"에 끌려가 폭행을 당한 경험을 다시 한 번 직접 증언하였다.

2.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ㆍ투옥
1989.10.13일, "주한 미국대사 관저(서울 정동)"를 점거하여, 폭탄 투척ㆍ방화미수 사건을 주도하였다. "대사관저"를 점거한 후, "노태우 대통령"의 매국 방미 반대, "그레그 주한미국대사" 추방 등을 요구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사관저에 방화 시도 및 사제 폭탄을 투척하였다. 대치하던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1.08일 투옥되었다.
1990.03.28일, "폭탄테러미수 주동자"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수형으로 인해, 1990.12.05일 "보충역 및 소집면제 처분"을 받았고, 1991년 출소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되었다.
3. "마포 성산동"에서, "길잡이 학원" 운영
출소한지 몇개월 후인 1992년, 그는 재수시절 친구인 "양태회"와 동업으로 학원을 창업했다. "양태회"는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출신으로,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의 모태가 된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던 동지였다. 학원 이름은"'길잡이 학원"이었는데, 당시 대규모 "시영아파트 단지(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초등학생ㆍ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학원이었다. "성산동 시영아파트 단지"는 당시 개발 중에 있던 노원구를 제외하면, 당시 서울 강북 최대의 아파트 단지였다. 서울에서 매우 특이하게도 "소 평수 아파트"로만 구성된 단지였기 때문에, 현재도 단지가 노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초등학생이 매우 많은 지역이다.
그는 "공과대" 출신이었으나, 수학이 아닌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편 "양태회"는 "불문과" 출신이었으나 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교육 경험이 없었지만, 재수시절 경험과 문법위주 강의로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양태회"는 이미 대학 시절부터 과외나 학원에서 잔뼈가 굵었고, 나중에는 비상교육을 차려 "사교육 재벌"이 되는 등 사교육계의 최고 전문가 중 1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장들이 청소ㆍ잡일까지 다해야했다고 말했지만, 이런 시절은 개원 후 잠시였고, 두 원장의 의기투합으로 학원은 곧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길잡이 학원"은 불과 2년여 만에 직원이 100여 명일 정도의 엄청난 대형학원으로 성장했다. 90년대 전국에서 이 정도 이상 규모의 대형학원이 몇 개 안될 정도였다.
당시 "길잡이 학원"은 "마포 성산 지역"에서 "스파르타 식"으로 대단히 유명했다. 학원 이름이 "길잡이 학원"이었는데 체벌이 심한 것으로 유명해, 동네 초등학생ㆍ중학생 사이에서는 "가면 애 잡는다"고 "애잡이 학원"으로 더 많이 불렸다. 90년대 초, "길잡이 학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갑작스런 성공으로 급격히 규모가 커졌던 학원은 "체벌" 이외에 제대로 된 시스템이 부재했고, 마구잡이로 채용한 강사들의 수준도 들쑥날쑥이라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평도 얻게 된다. 결국 지나친 "체벌에 대한 거부감"으로 다른 신진 강사들이 세운 다른 학원으로 학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996년 공동 원장인 "양태회"와 갈라서며, 학원을 접게 되었다. 이후 타인에게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대형학원이었던 만큼, 매각으로 상당한 거액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태회"는 "길잡이학원"을 접은 직후, "비상교육"을 창업했고, 한때 대표적인 사교육 재벌 중 1명으로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정청래"는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공하게 된다.

4. 정계진출 : 2002년 "노사모 회원" 시절
2002년경, "노사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인터넷상에서 "싸리비"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많이 써서 꽤 유명해졌다. 그 후 "명계남ㆍ문성근" 등과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준비하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지역구 전환이 가능한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무실을 얻어 상근자 30여 명과 함께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그 후에도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한 유권자 운동을 하였다. "열심히 욕한 당신, 이제 찍어라"라는 구호를 걸고, "대학교 내, 부재자 투표함 설치운동"으로 전환해 활동했다. 그 즈음 "효순이ㆍ미선이 사건"이 발생하자, "효순이ㆍ미선이"를 추모하는 뱃지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2002.12.19일, 치러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이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5. 2004년 : 17대 국회의원 당선 (초선)
2004.02월, "노무현" 지지단체인 "국민의 힘"을 이끌던 당시, "문성근ㆍ이상호" 등과 함께 "정동영"의 지지세력인 "정사모"와 "국참본부"가 주축이 된 "개나리 봉사단"이란 조직에 단체를 이끌고 들어가면서 "정동영"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 실질적인 정계 활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열린우리당" 안에서 "친노"이면서, 동시에 "정동영 계"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친노"의 실질적인 주류가 된 "유시민 계"와 잦은 마찰을 빚게 되면서, "친노" 안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후, 2달 뒤인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엄청났던 "탄핵 역풍"에 힘입어, 44.8%의 득표율을 얻어, "강용석 후보 (한나라당)"를 꺾고 당선됐다. 차기 대권주자인 "정동영"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 하락으로 결국 "열린우리당"이 해체되었고,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기 얼마 전, 그는 "정동영" 등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갈아탔다. 이후 대선에서 "정동영 캠프"에서 홍보위원장 등을 맡으며, "정동영"의 당선을 위해 헌신했으나, "정동영"은 "이명박"에게 패해, 낙선하고 말았다.
6. 2024년 : 22대 국회의원 당선 (4선)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해서, "함운경 후보 (국민의 힘)"을 여유있는 격차로 이기면서, 4선 고지에 올랐다. 이어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으로도 임명되었는데, "민주당" 내에서도 강경파 성향으로 유명한 그는 "국민의 힘 소속, 법사위원들"과 말싸움을 포함한 신경전을 자주 벌이고 있다. 2024.12.03일,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당시, 국회 진입에 성공해, "계엄 해제 표결"에도 참여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가결되면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 "소추위원단 단장"으로 재판을 이끌게 된다.
7. 여담 : 유시민 (1959~ ㆍ작가ㆍ보건복지부 장관)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노사모" 조직은 처음에 "본인ㆍ명계남ㆍ문성근" 등이 함께 만들었지만, 외부에 있던 "유시민"과 지지자들이 들어와 염치없는 태도로 조직을 강탈해갔다고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친노" 적장자였던 "안희정"이 "노무현" 대신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이후, "유시민"이 친노의 중심인물이 되어갔고, 그의 지지자들이 노사모 홈페이지를 장악했으며, 초기 노사모의 핵심이었던 "문성근ㆍ명계남ㆍ이상호ㆍ정청래"은 오히려 겉돌게 되었다. 결국 "정청래ㆍ문성근ㆍ이상호"는 일부 세력을 이끌고, "유시민 계"와 대척점에 있던 "정동영 계"가 만든 "개나리봉사단"에 합류하고 만다.
그는 "친노"이면서도 "정동영 계"였는데, "열린우리당 내 호남계"를 극도로 비판해왔던 "유시민"은 특히 "정동영ㆍ문희상" 등 "열린우리당 내 호남계 중진들"을 여러차례 비난했었다. 이에 "정동영"의 측근이 된 그가 "유시민"을 맞 디스한 것이다. 일련의 디스전은 "대리전" 양상을 띄었는데, "유시민"이 "정동영"을 비난하면, "정동영"은 "유시민"에 대응하지 않고, 대신 "정청래"가 "유시민"을 공개 비난했다. 그러면 "유시민" 또한 "정청래"에게 직접 대응하지 않고 침묵하였으며, 대신 "유시민"의 지지자들이 "노사모"나 우리당 홈페이지 등을 통해 "정청래"를 맹비난했다. "유시민"은 자신 동급, 즉 각 계파의 수장급인 "정동영ㆍ문희상ㆍ김근태"만 비판했고, 그들의 대변인격인 "정청래"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유시민"과의 관계는 "노무현 정권" 말기로 갈수록 더욱 극악으로 치달았는데, 정권 후기에 "정청래"는 완전히 "정동영"의 최측근이 되었기에, "유시민"과는 정치적으로 척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07.09.16일, "유시민"이 대선 출마를 포기하자, "정치 기술자 유시민은 대중으로부터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 사실 한 발짝 움직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는 이미 숱한 거짓말로 대중을 현혹해 왔다. 거짓말은 새로운 거짓말을 낳고 끝내 그 거짓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어 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그의 말로를 나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한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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