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신 (任永信ㆍ1899~1977ㆍ78세)"은 "최초 여성 국회의원 (제헌국회의원)ㆍ최초 여성장관 (상공부장관)"이었다. 1949년, "친 이승만" 성향 야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ㆍ운영하였고, "국민당"이 해산된 뒤에는 다시 "대한여자국민당(최초의 여성정당)"으로 개편하여, 1961년까지 유지하였다. 1960년 이후,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야당 인사로 활동하다가, 1961년 "군사정변" 이후 군정지지를 선언했다.
1. 임영신 (任永信ㆍ1899~1977ㆍ향년 78세)
중앙대 설립자ㆍ교육자ㆍ독립운동가(친일활동 의혹)ㆍ정치인 (최초 여성장관)ㆍ이승만 최측근 (이승만 청혼거절- 24살 차)ㆍ제헌국회의원(최초 여성 국회의원ㆍ장택상에게 승리)
• 출 생 :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 사 망 : 서울 (중앙대 교정 내, "할매동산"이라는 곳에 있었으나 2009년 동상을 옮기며 묘를 없애고, 시신은 화장해서 동상 밑에다 묻었다고 한다. 현재, 묘가 있던 자리에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 호 : 승당 (承堂)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온 것 • 별 칭 : 루이스 임 (Luise Yim) • 사 인 : 병사 • 종 교 : 개신교
• 학 력 : 남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
• 남 편 : 한순교 (이혼)→ 1939년 미국에서 결혼ㆍ1940년 임영신 혼자 귀국) • 가 족 : 12남매 중 5째 (2째 딸)ㆍ조카 : 임철순 (任哲淳ㆍ2째 오빠 아들ㆍ중앙대 2대 총장) • 친 구 : (고향) 유진산ㆍ이현상 (정치적) 윤치영 (가장 친한 친구ㆍ교육계 동료) 황신덕
• 수 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ㆍ청조근정훈장ㆍ미국 아이젠하워 상 • 저 서 : 내가 한국을 위해서 분투했던 40년
1932년, "중앙보육학교", 1941년에는 "경성중앙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45.08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됐고, 1946.09월 "중앙여자대학(중앙대 전신)"을 설립하고, 학장이 되었다. 1949년,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가하였다가, 제3대ㆍ4대ㆍ5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경북 안동"의 "제헌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고,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재선되었으며, "UN총회 한국대표"로도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49.05.28일,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임영신"과 비서 등 18명이 연루돼, 배임ㆍ수뢰ㆍ사기ㆍ횡령 등으로 기소됐다. 그 뒤 자유당 내, "이기붕 계열"이 성장하면서, 견제 당하다가, "윤치영ㆍ이범석ㆍ이윤영" 등과 함께 "이승만" 곁에서 밀려나 배척당했다. 이후 "친 이승만" 인사이면서도, "이기붕 계열"을 공격ㆍ비판하는데 가담하였다. "중앙전문학교 학장ㆍ중앙대학장ㆍ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다가, 1963년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2. 이승만과의 관계
① 1931년 : 이승만의 청혼 (이승만 56살ㆍ임영신 32살 : 24살 차)
독립협회 활동ㆍ수감ㆍ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이승만"은 첫 아들인 "이태산 (李泰山ㆍ봉수(鳳秀)ㆍ1899~1906(8살))"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1906년 경)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1년, "이순길(이승만 측근ㆍ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를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녀는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청혼을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중략) 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그녀를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그녀는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다.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② 이승만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
1945.10.16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이승만"이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홀로 귀국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돈암장"에 기거하였으며, 그녀는 "이은혜(異恩惠ㆍ1902~1980ㆍ78세ㆍ윤치영 2째 부인ㆍ대한국민당 부총재)"와 함께, 자주 드나들며, "이승만"을 도왔다. 이 무렵, "이승만"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소문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그녀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이 소문은 "한국에 오라"는 "이승만"의 답신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에게는 낯 뜨거운 이야기였다. 소식을 접한 "프란체스카"는 크게 노하여,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프란체스카"는 그녀를 냉대하였고, "돈암장" 출입을 금지하였다.
3. 제헌국회의원 (경남 안동을) 보궐 승리, "장택상"에게 승리
1949.05.28일 보궐선거 때,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상공부장관직 사임
1949년, "정현모 경북 도지사" 취임으로 공석이 된, "경북 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녀는 "대한국민당 당수"로서, 출사표를 던졌고, 선거에서 "장택상"을 이겨 화제를 모았다. "임영신ㆍ장택상"은 서울에 주소를 둔 원정 출마에다, 성(性)대결까지 펼쳐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여성 최초의 장관경력 소유자인 그녀가 승리함으로써,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였으나, 객지에서 그녀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의 입김(관권 지원)ㆍ임영신의 화끈한 돈 씀씀이(자금살포)" 때문으로 알려졌다. 결국 1949.05.28일,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배임ㆍ수뢰ㆍ사기ㆍ횡령 등으로 비서 등 18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정부 감찰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임장관"은 1948년 총선에 출마해서 생긴 선거 빚을 갚기 위해, ① 상공부 산하 대구 메리야쓰 공장의 면사를 담보로 300만 원을 융자받고, 공장 공금 244만 원을 유용했으며, ②이승만 대통령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상공부 각 국장들과 국영기업체에 각각 5천만 원, 595만 원을 모금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장관 등 9명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9명은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1949.0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4. 친일 의혹
1941.12.13일, "우리들은 임전 체제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과거에 구애받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구애 없이 2,400만 반도민 모두 일치 결속하여, 성전(聖戰)완수로써 황국의 흥융을 기하며, 성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할 것을 맹세한다."는 선서와 함께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01.05일 산하기관으로 소위 총후(銃後ㆍ방) 부인진영을 망라해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발족시켰는데, 그녀는 여기에 "김활란ㆍ박순천ㆍ박마리아" 등과 함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노천명ㆍ모윤숙 등은 간사로 참여).
이 단체는 1942.03.14일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로 통합, 새 출발했는데, 20세 미만의 미혼자를 제외한 전 여성으로 조직하여, "고도 국방국가 체제에 즉응하기 위하여, 황국전통의 부도(婦道)에 즉해서 수신제가 봉공의 실을 거둔다."는 목적 아래, ⓛ 국제 관념의 함양ㆍ부덕(婦德)수련 ② 내선일체(內鮮一體)구현 ③ 국방사상의 보급 철저 ④ 가정생활의 정비ㆍ쇄신 및 비상시의 준비 확립에 관한 사항 ⑤ 2세 국민육성과 가정교육 진흥 ⑥ 군인 원호 ⑦ 국방상 필요한 훈련 ⑧ 직분봉공(職分奉公)ㆍ인보협동(隣保協同)에 관한 사항 ⑨ 저축 장려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2.02.01.일, 저녁 7:30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가정생활에도 결전 체제를 바란다"는 제하의 방송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녀는 또 다른 친일단체였던 "조선보육연맹"에 "독고선ㆍ차사백"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평생을 통해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던 교육계 동료 "황신덕(黃信德)" 역시 1938년 이후, "국민총력연맹ㆍ전위 여성격려대ㆍ시국 부인대강연"등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녀의 친일활동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록에 나타나는 친일활동을 볼 때, 우선 그녀가 창씨개명을 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며, 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던 여성들이었던 "김활란ㆍ박순천ㆍ박마리아ㆍ노천명ㆍ모윤숙" 등과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초기에 미국에 있었던 점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의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5. 연 보
1932 : 중앙보육학교 설립 → 1941 : 경성중앙유치원 설립ㆍ"조선임전보국단"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 → 1942 : "조선임전보국단" 지도위원으로 참여ㆍ지도위원 (임영신ㆍ김활란ㆍ박순천ㆍ박마리아)ㆍ간사 (노천명ㆍ모윤숙)ㆍ"조선보육연맹"에 주도적 참여 (독고선ㆍ차사백 등과 함께).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던 교육계의 동료 "황신덕(黃信德)"은 1938년 이후, "국민총력연맹ㆍ전위 여성격려대ㆍ시국 부인대강연"등에 참여,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앞장
1945 : 대한여자국민당 창당/총재 (이은혜(부당수)ㆍ김활란 등과 함께)ㆍ중앙여자전문학교 설립/교장 → 1946 : 중앙여자대학 (중앙대 전신) 설립ㆍ학장 → 1948 : 정부수립 후, 상공부장관 (여성 최초의 장관)ㆍ중앙여자대학→ 중앙대학으로 개편/학장ㆍ대한국민당 창당(친 이승만 성향 야당ㆍ윤치영 참여시켜 주도) → 대한여자국민당 + 대동청년단(지청천)→ 지청천ㆍ신익희 계열 이탈로, 군소정당화
1949 : 제헌국회의원(경남 안동을) 보궐 승리 → 장택상에게 승리 → 1949 : 05.28일 보궐선거 때,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기소ㆍ대한국민당(친 이승만성향 야당)창당 → 1953 : 중앙대학을 종합단과대학으로 승격ㆍ초대 중앙대학교 총장 취임 → 1950 : 상공일보사 (商工日報社) 사장 → 1952 : 여성계사 (女性界社) 사장
1953 : 빨치산 "이현상"이 사살되자, 동향 출신인 "유진산"과 함께 신원 확인 → 1958 : 대한국민당 해체→ 일시적으로 자유당 복귀→ 대한여자국민당(최초의 여성 정당ㆍ대한국민당 개편) → 1960 :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이은혜ㆍ박마리아 등 우익성향의 여성 인사와 함께 운영) 4ㆍ19이후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야당 인사로 활동
1961 : 5ㆍ16군사정변 후, 군사혁명 지지선언과 극찬을 보내며, "공화당"에 참여ㆍ"대한여자국민당"은 군정 세력과 합당하여, "재건당"으로 조직ㆍ중앙문화학원 이사장 → 1961~1974 : 한국부인회 회장 → 1963 : "재건당" 창당에 참여, "민주공화당"으로 개편시, 창당발기위원ㆍ"정구영ㆍ윤치영ㆍ윤일선" 등과 "민주공화당" 입당, 총재고문ㆍ한국부인회 회장
1965~1972 :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 1966 : 세계교직자연합회장 → 1969 :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ㆍ"박정희 3선 개헌"에 "윤치영"과 함께 적극 지지 → 1971 : 민주공화당 고문ㆍ대한교원공제회 초대 이사장 → 1972 : 중앙문화학원 이사장 → 1972~1976 : 통일주체국민의회 대의원ㆍ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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