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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126 : (고려) 이자겸ㆍ척준경의 난

by 당대 제일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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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년(인종4)에 발생한, "이자겸척준경"의 난은  "척준경"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ㆍ척(李拓)의 난"이라고도 한다.

 

1. 1126(인종4) : 이자겸척준경의 난

"예종ㆍ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자신의 측근세력을 종용하여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들을 제거한 다음, 왕을 유폐시키며 정치를 독단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한 결과, "이자겸"은 얼마 안 있어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다.

"이자겸"의 심복으로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척준경"이 "이자겸"으로부터 등을 돌린 까닭은, 아들 "이지언"의 그에 대한 비난 보다는, "인종"이 "이자겸"을 외면한 데 있었다. "이자겸" 권력의 원천은 왕이었는데, 왕이 그를 외면한 상황에서 그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척준경"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겸의 난"을 통해, 당시 귀족들이 "정권ㆍ왕권"을 둘러싸고, 상호간에 얼마나 치열하게 싸움을 되풀이했는지 알 수 있다. "이자겸의 난"으로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졌으며,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궁궐"이 모두 불탐으로써 귀족층의 분열ㆍ대립이 표면화되거나,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되었다. 즉 "이자겸ㆍ척준경"이 제거된 이후, "개경"의 귀족세력 가운데서도 특히 "김부식 형제(경주 김씨)"ㆍ이수(경원 이씨)ㆍ임원애(정안 임씨ㆍ새로운 외척ㆍ이자겸 딸(두 왕비) 폐비 후, 인조의 새 왕비)" 계열이 크게 부상했다.

한편, "척준경"을 탄핵하는 공로를 세운 "정지상"을 중심으로, "묘청(승려)ㆍ백수한(일관(日官)ㆍ천문 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 등의 "서경" 출신 신진 관료가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이후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서경 출신 귀족"과 이에 반대하는 "개경 귀족"의 충돌로, 귀족세력 자체 내의 분열이 극심해졌다.

① 사건의 전개

"고려 귀족사회"는 "문종(고려 11대 왕ㆍ재위 1046~1083)" 때를 전후하여, 자신의 정치적ㆍ경제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심화되어갔다. "이자겸"은 "문종" 때부터, 80여 년 간 외척으로서 세력을 굳힌 "경원 이씨" 출신으로, 1122년 "예종"이 죽자, 자신의 외손인 "인종"을 즉위시키고,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반대파인 "한안인(?~1122)" 등의 일파를 살해ㆍ유배시켰고, 자제ㆍ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고, "3째 딸ㆍ넷째 딸"을 "인종 비"로 들였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배경으로 전횡이 심했으며, 사사로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1126년, "인종"은 "이자겸"의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자겸ㆍ척준경"에 밀려 실패했다. 이후 "인종"은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고, 1127년에 "척준경"도 제거하였다. "이자겸의 난"으로, 정치 기강은 더욱 문란해졌으며, "귀족층"의 분열ㆍ대립이 표면화되거나,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되었다. 외척세력으로, "재상(宰相)"의 반열에 들어선 "이자겸"과 신진 관료인 "한안인 일파"는 상호대립하게 되었고, 1122.04월(예종17), "예종"이 죽으면서 "개경"의 귀족사회 자체 내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자겸"은 자기 집에서 성장한 14세의 외손인 "인종"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 공으로 "수태사 중서령"의 최고 직을 제수 받았고, "예종의 동모제(同母弟)"인 "대방공(帶方公)ㆍ대원공(大原公)"을 "왕위찬탈의 음모자"로 무고하고,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반대파인 "한안인 일파"를 살해ㆍ유배시켰다. 또한 1124년(인종2), 무인 출신으로 권세를 잡았던 "최홍재(?~1135)"를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제ㆍ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했으며, 3째 딸과 3째 딸을 "인종 비"로 들였다.

이후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배경으로, 남의 토지를 탈점하고,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는 등 전횡이 심했으며, 사사로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면서, 자신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는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자칭했으며, 심지어는 이 직함을 "왕"이 직접 내려주도록 강청했다. 이를 계기로 "인종"은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마침내 내시 "김찬ㆍ안보린" 등과 의논하여, "지녹연(동지추밀원사)ㆍ최탁(상장군인)ㆍ오탁(상장군인)" 등과 함께 1126.02월에 거사했다. 

"오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궐내로 들어가, "이자겸"의 일파인 "척준신ㆍ척순"등 5~6명을 살해했다. 이 급보를 접한 "이자겸"과 측근인 "척준경"은 잠시 당황하다가, 먼저 "척준경"이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대궐 앞으로 나오고, 이어 "의장(현화사(玄化寺) 주지ㆍ이자겸 아들)"이 승병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궁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척준경"이 중심이 되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잡아 살상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인종"은 "난"을 피하여, "산호정(山呼亭)"으로 갔으며, 신변에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이자겸"에게 "서(書)"를 보내,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자겸"은 양부의 의논이 두려워,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종형제인 "이수"의 반대로 그 "서(書)"를 "인종"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자겸"은 "이 씨가 왕권을 잡는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2차례나 "왕을 독살"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딸인 "왕비가 인종을 도움"으로써 실패했다.

"인종"은 "이자겸ㆍ척준경"의 사이를 떼놓음으로써, 수습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지언(이자겸 아들)"과 "척준경의 노비"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이자겸ㆍ척준경"의 사이에 생긴 틈이 생기자, "인종"은 "최사전(내의(內醫))를 통해, "척준경"에게 교서(敎書)를 전해주었다. 교서 내용은 "척준경"에게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이자겸"을 제거해 큰 공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었으며, 이어 "김부일(김부식의 형)"을 "척준경"에게 보내어, "이자겸"의 제거 계획을 독촉했다. 이에 "척준경"은 무력을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귀양 보냈다.

그리하여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가 폐비되었으며, "임원애"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이어 "척준경ㆍ이수ㆍ김향ㆍ최사전"은 "공신호와 관작"을 받았고, "이자겸"은 그해 12월 유배지인 "영광(靈光)"에서 죽었다. 그 후, "척준경"은 공신으로서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나 사양하고, "문하시랑"의 직을 받아 잠시 동안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공을 믿고 지나치게 부리다가, 1127.03월(인종5), "정지상(좌정언(左正言))"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갔다.

이자겸

2. 이자겸 (李資謙? ~ 1127)

예종/인종의 장인인종의 외조부고려 문신치인(섭정)시인권신(權臣)척신(戚臣)ㆍ"경원 이씨"를 당대 최고의 문벌 귀족 가문으로 끌어올린 "이자연(李子淵)"의 손자

"예종"이 죽자, 외손자인 "인종"을 추대하였으며, 왕위를 찬탈하려던 왕실의 친인척을 숙청하였다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자, 자신의 두 딸이자 이모가 되는 "폐비 이씨폐비 이씨" 자매를 외손자인 "인종"에게 시집보내 권력을 누렸으나 뒤에 "인종"을 독살하려다가 도리어 "인종"에 의해 제거되었다1126,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반대파 인사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인종"이 회유한 그의 사돈 "척준경(拓俊京)"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전남 영광군"에 유배되어 말린 생선을 먹고,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이름을 붙인 것이 "영광 굴비"의 어원이 되었다.

① 영광 굴비 (석어)

당시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조기"의 한 종류에 그는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1126(인종4) "5월 난"을 일으킨 이자겸을 "영광 법성포"로 귀양을 보냈고, 이자겸은 그 해 12"법성포"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해풍에 말린 "조기과의 생선"을 먹어보고, 그 맛이 좋자 임금에게 선물로 진상하면서,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조기"의 일종인 한 물고기에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굴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그는 굴비를 다른 이름으로 "석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이 당시는 "조기"를 소금으로 절여 토굴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하룻밤 지내고 꺼내 말렸기 때문에 "석어"라고도 불렀다는 것이다.

3. 척준경 (拓俊京? ~ 1144)

고려 중기의 무신정치인군인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의 아들ㆍ1104(숙종9)~ 1109년까지 "윤관오연총왕자지" 등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을 쌓는데 기여하였다. 뛰어난 용맹으로 "여진족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자겸"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1126, "척준경"은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할 태세를 갖추었다"이자겸"의 군사들이 저항했으나, "척준경"의 위세에 눌려 간단히 제압되었다이어 "김향이공수"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이자겸"의 군사들을 제압한 다음 "이자겸"을 불러냈다그러나 "도성""척준경"이 도착한 줄을 생각하지 못한 "이자겸"은 계속 정사를 보고 있었다그 사이에 "척준경""인종"을 안전한 "군기감"에 데려다 놓고, 수하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한 다음 "승선 강후현"을 파견하여 "이자겸"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안 "이자겸"은 소복 차림으로 "인종" 앞에 나온 후 곧바로 옥에 갇혔다가 "영광"으로 유배되어 훗날 귀양지에서 사망했다. "척준경""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모두 "팔관보"에 가두고, 그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 "강호 고진수"를 죽였다그러나 "척준경"의 위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척준경""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내세우며 권세를 부리려 하자, "인종""척준경"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언(正言) 정지상""척준경"의 옛 죄를 들어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1127.03"암타도(巖墮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1127.03"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라는 "정지"의 탄핵을 받아 "암태도"로 유배되었다가, 1128.04"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참작하여 "준경"의 귀양지를 "암타도"에서 고향인 "곡주"로 옮기게 하였으며, 1130.10월에는 "죄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가족들과 한곳에 살도록 했다1144.02, "인종""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에 임명, 바로 상경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인종은 그의 관직을 회복하고, 자손들에게도 출사 길을 열어주었다.

4. 윤관 (尹瓘1040~ 111171)

고려 중기 문신(문과에 급제한 문신)군인숙종/예종 때 여진족 토벌에 출정ㆍ"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을 공략하였으며, 북방을 방비하는데 기여하였다.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숙종" , "여진족 2차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예종"은 부왕인 "숙종""여진 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 정벌"에 힘썼다이후 특수부대 "별무반(30)"을 창설하여, ""윤관오연총" 함께 병력을 훈련하였다.

1107(예종2), "여진족 3차 토벌" , "대원수"에 임명되어 "별무반"을 이끌고 "부원수 오연총준경왕자지"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을 쌓고, "여진족"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예종3) 개선하였다그러나 "여진족""동북 9성 반환" 요청이 있자 그는 반대하였으나, 고려 조정은 화의론을 주장하여 "9"을 되돌려주었고, 1109"길주성"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한때 "공신호"를 박탈당하고 해임 당하였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복직하였다.

① 오연총 (吳延寵ㆍ1055~ 1116ㆍ61세) : 고려 중기 문신

② 왕자지 (王字之ㆍ1066~ 1122ㆍ56세) : 고려 중기 내시ㆍ문신ㆍ외교관ㆍ음악가ㆍ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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