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은 1890~ 1892년,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는데,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고,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거사 과정에서도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이준용 (흥선대원군의 적장손ㆍ고종의 형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은 수시로 "민씨 정권" 전복을 위해, "동학 농민군"과 접촉하였다.
1. 흥선대원군과 전봉준의 내통
1890~ 1892년,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이준용"은 수시로 "민씨 정권" 전복을 위해, "동학 농민군"과 접촉하였다.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고,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북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0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재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연결을 계속하였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ㆍ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고,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기에,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ㆍ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최시형"은 "전봉준"등이 "흥선대원군"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원군"에 의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 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2. 동학농민군 지도자들 포섭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ㆍ이방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 중에는 "전봉준ㆍ김개남" 외에도 "손화중ㆍ이방언" 등 "남접의 최고 지도자"들 상당수가 "흥선대 원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원군"이 포섭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손화중"도 있었다.
"유 씨(손화중의 부인)"가 임종 직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손화중도 대원군을 만나고, 그의 서신도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중에 서울을 다녔는데, 대원군하고 직접 상면을 했다"고 한다.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다."는 증언을 했다.
"이방언"과 "대원군"의 관련설은 "녹두장군(송기숙 저)"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지도자 중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처형당하기 전에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무죄 방면"되어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이방언"은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전라도 관찰사"에 잡혀,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러나 "이방언"은 방면되었어도, 바로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바로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회천면"에 있는 "보성 군수(동학 협조자)"에게로 갔다.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감사"의 "재 체포령"에 의해서 잡혀서, "장흥 장대"에서 "외아들 이성호"와 같이 동참을 당했다. 총살이나 효수가 아니고, 분살형(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 짚을 씌워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을 당한다.
3. "대원군"의 "동학농민군" 거병사주
① "제3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ㆍ정인덕"은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② "대원군"이 "동학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 1894.02.21일, "미하일 히트로포(주일본 러시아공사)"가 "칼 베베르(주조선 러시아공사)"에게 보낸 비밀 정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
③ "공문ㆍ통문ㆍ정장"에 나타난 "국태공 (흥선대원군)" 추대론
• "백산"에서 "전봉준"이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 1894.05.22(음 04.18), "전봉준"은 비협조적이던 "나주 관아의 호장ㆍ이방ㆍ서리" 등에게 공문을 발송하였다. "전하께 아뢰어, 국태공(흥선대원군)을 모셔다가, 나라일 을 보도록 하려 함으로써,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모조리 파면시켜 내쫓으려는 것이니, 우리의 본의는 여기에 그칠 뿐이다."
• 1894.05.20(음 04.16) "영광군"에서 "창의소"명의로 "완영 유진소"에 보낸 통문에서도 "국태공께 감국 하게하여, 위로는 공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한다."
• 1894.05.23(음 04.19) "전봉준"은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정장"을 보냈는데, "억조(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의논을 모아 국태공(흥선대원군)을 모시고, 부자 사이의 윤리와 군신 사이의 의리를 온전히 하여, 아래로는 여민을 편안히 하고,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장차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변치 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옵소서"
4. 흥선대원군 세력의 개입
1894.02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ㆍ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에게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 "동학 남접"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인 "전봉준"이 한때,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식객"이었던 점도 이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군" 주장 중,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섭정)"도 요구하고 있었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 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ㆍ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
"동학교도ㆍ농민들ㆍ양반사대부ㆍ지식인층"이 가담하고, "불교 승려"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을 접한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고종ㆍ명성황후"를 타도할 계획을 수립한다.
정치 문제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북접"을 제외한 "남접ㆍ서포"는 모두 부패한 탐관오리ㆍ척신을 싸고도는 "왕비"를 원수처럼 여겼으므로,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손자 이준용"을 추대하기로 작심한다. 1894.07월경부터, "대원군파"는 "일본" 세력을 퇴치하기 위해, 지방의 사회세력과 "평양"의 "청군"의 협력을 받으려 하였고, 이때 "동학군"에게도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ㆍ지방의 토호세력ㆍ양반유림ㆍ공신의 자손들ㆍ보부상"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 보익ㆍ군수지원"을 촉구하였다.
5. 1893.02.11.~13일 : 교조 신원운동에 대원군 개입 (동학도의 "경복궁" 앞 "복합 상소운동")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鄭喬ㆍ1856~1925ㆍ학자ㆍ항일 우국지사)"는 1893.02.11.~13일까지(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6. "흥선대원군ㆍ이준용"의 정변 음모
① 대원군 일파 (이준용ㆍ이태용ㆍ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1894.06월,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ㆍ이태용ㆍ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 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ㆍ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한편 "전봉준" 등은 "일본군"의 유입으로, "농민군이 분기탱천해 있음"을 "대원군"에게 알려왔다.
② 대원군 일파 모의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이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ㆍ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ㆍ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ㆍ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 "개화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ㆍ12월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 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동학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까지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 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ㆍ유길준ㆍ조희연ㆍ김가진ㆍ김학우ㆍ안경수ㆍ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ㆍ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흥선대원군ㆍ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척사파 계열 유학자"들도 동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ㆍ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③ "대원군ㆍ이준용"의 음모 탄로
"대원군ㆍ이준용"은 "동학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 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1894.10월 중에 "청국 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영의정(박준양)ㆍ좌의정(이태용)ㆍ충청감사나 영남감사(고운정)ㆍ전라감사(고종주)를 임명하려고 하였다.
08.24일, "청ㆍ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 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 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인 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
그러나 "대원군ㆍ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대원군ㆍ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과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 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0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남 동래군ㆍ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④ 개화파의 중진인물 암살계획
서울에서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 중진인물인 "김홍집ㆍ유길준ㆍ김학우ㆍ김가진ㆍ안경수ㆍ조희연ㆍ김종한ㆍ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고, "동학농민군" 일부는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0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ㆍ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 이후 "농민군"은 감쪽같이 빠져나갔고, "대원군"을 체포할 수 없었던 내부에서는 "이준용"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감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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