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白石ㆍ본명 : 백기행(白夔行)ㆍ1912~1996ㆍ향년 84세)"은 "김영한(한국 3대 요정(삼청각ㆍ청운각ㆍ대원각)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ㆍ기생)"과의 사랑이야기가 유명하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평북 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 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 백석 (白石ㆍ본명 : 백기행(白夔行)ㆍ1912~1996ㆍ향년 84세)
일제강점기(청년기)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훈남 시인ㆍ소설가ㆍ번역 문학가
• 출 생 :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 사 망 :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 학 력 : 평북 정주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 졸업
• 필 명 : 백석(白石ㆍ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ㆍ"석(石)"이라는 이름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ㆍ일본 시인)"의 시를 매우 좋아하여, 그 이름의 "석(石)"을 빼와서 썼다고 알려져 있다.
• 본 명 : 백기행(白夔行)ㆍ백기연(白基衍)
• 연 인 : 1935년- 난ㆍ박경련(당시 이화고녀 학생) / 1939년- 자야(子夜)ㆍ김영한(金英韓ㆍ1916~1999ㆍ향년 83세ㆍ기생 : 진향(眞香)ㆍ법명 : 길상화(吉祥華)ㆍ한국 3대 요정(삼청각ㆍ청운각ㆍ대원각)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ㆍ기생
• 평 가 : 당시 "조만식(독립운동가)"이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 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 저 서 :① 사슴 : 1936.01.20일 자가본(自家本)으로 발행한 시집ㆍ총 3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ㆍ"판권지 상단"에는 "詩集(시집) 사슴 百部 限定版 定價 二圓(100부 한정판 정가 2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著作兼 發行者 白石(저작 겸 발행자 백석)"이라고 되어 있다 • 1부 얼럭소새끼의 영각(6편)- 가즈랑집ㆍ여우난곬족(族)ㆍ고방ㆍ모닥불ㆍ고야(古夜)ㆍ오리 망아지 토끼 • 2부 돌덜구의 물(9편)- 초동일(初冬日)ㆍ하답(夏畓)ㆍ주막(酒幕)ㆍ적경(寂境)ㆍ미명계ㆍ성외 등 • 3부 노루(9편)- 노루ㆍ산비ㆍ쓸쓸한 길ㆍ머루밤 등 • 4부 국수당 너머(6편)- 통영(統營)ㆍ절간의 소이야기ㆍ오금덩이라는 곳ㆍ정주성(定州城) 등
②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1938년에 발표한 시,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노래한 작품 ③ 서행시초(西行詩抄): 1939년 "조선일보"에 재입사한 그가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ㆍ 팔원(八院): 연시 "서행시초(西行詩抄)"의 3번째 시로, 승합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던 도중 차에 오르는 "나이 어린 게집아이"의 모습을 보고,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족의 비극적 삶을 떠올리며 이를 형상화한 내용. 승합자동차 안팎의 상황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④ 남행시초 (南行詩抄):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경상남도 통영ㆍ고성ㆍ창원ㆍ 사천"을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2. 백석의 사랑 : "난" ㆍ통영 (남행시초에 있는 시ㆍ1936. 조선일보)
① 남행시초 (南行詩抄)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경상남도 통영ㆍ고성ㆍ창원ㆍ사천"을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② 백석의 사랑 : "난"이 살던 "통영"
1935년,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통영" 출신인 "박경련(당시 이화고녀 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그녀에게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고, 후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오지만 "난"이 겨울방학이 끝난 무렵이라, "서울"로 상경한 탓에 길이 엇갈린다. "난"의 집이 바로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고, "백석"은 이 시에서 "명정골"의 이름과 유래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난"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이러한 "백석"의 사랑은 친구의 배신으로 끝나게 된다. "난"을 소개해 주었던 친구 "신현중"이 "백석"과 "난"의 혼담을 방해하고, 도리어 "난"의 집안으로부터 자신과의 "혼인 승낙"을 받아 낸 것이다.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인연마저 끊어지게 된 "백석"은 시를 통해 괴로움을 토로한다.
③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간다.
"통영"을 찾아 온 화자가 "통영"의 정취와 특징을 소개하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아쉬움ㆍ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이 시는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왔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로, 화자는 "갓 같은 모양ㆍ짭짤한 바람과 물ㆍ여러 가지 특산물ㆍ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 "통영"의 정취ㆍ특징을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개하고, "통영"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통영"을 소개하던 화자는 살며시 "난"이라는 여인에게로 시상을 전환한다.
"난"이 사는 "명정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곳 샘터에서 물 긷는 처녀들 중에 "난"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 혼기가 찬 "난"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화자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뱃사공처럼, "통영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난"의 고운 자태를 떠올릴 뿐이다.
2. 길상사 (吉祥寺)의 유래
① 김영한 (金英韓ㆍ1916~ 1999ㆍ83세ㆍ자야(子夜)ㆍ기생- 진향(眞香)ㆍ법명- 길상화(吉祥華)
한국 3대 요정(삼청각ㆍ청운각ㆍ대원각)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ㆍ기생ㆍ백석과 나이차 4살,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16살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은 "춤ㆍ노래ㆍ문학"이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를 그만하고, 둘은 3년의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3차례, 그때마다 "김영한"을 찾아오지만, 결국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한다.
② 길상사 (吉祥寺)
"김영한"이 "법정 스님"께 시주한 사찰로, 1996년 "대원각"으로 모은 평생재산 중, "현금 2억 원"은 "백석문화상"으로 기금하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ㆍ땅은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였다. 1999.12월 어느 날, "KIST(한국과기대)"에 "김영한"의 유언장 1통이 전달되었다. 한국 과학기술 영재 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 원이 넘는 소유의 부동산을 기부하고 돌아 가셨다. "대원각"은 대지 7,000여 평에 40여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요정 대원각", 당시 시세로도 1,00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김영한"이 죽기 전, 기자가 물었다.
• 1,000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 1,000억을 내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지요. 그게 무슨 소용 있어? •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할거야 •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 시(詩)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시를 쓸 거야.
1997년,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 않으려는 "법정 스님"은 결국,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 스님"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1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고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 "김영한"은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라는 유언을 하고, 이튿날인 11.14일, "108염주"를 목에 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 법회" 때는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최종태(천주교 신자)"가 "성모 마리아 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③ 백석(白石)과의 사랑이야기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난한 탓에, 16살 어린 나이에 몸이 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사이,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18세에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ㆍ궁중 무"를 배워, "서울 권번 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ㆍ글ㆍ글씨ㆍ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1939년 23살 때, "흥사단ㆍ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김영한"보다 4살이 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 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이다"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김영한"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는데,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의 김영한"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 영생여고"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 없이 "김영한"의 옆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 날" 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김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백석에게 걸림돌이 될 것 같은 마음"에 "김영한"이 끝내 거절하자, 1939년에 "백석"은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 두 사람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 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김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 뒤라,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④ "자야(子夜)"라는 애칭
어느 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子夜吳歌)"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子夜)"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詩)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 가을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 있다.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子夜歌)"를 썼다.
"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붙여 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도 "내 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던 것은 아닐까."
⑤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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