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曺植ㆍ1501~1572ㆍ71세)"은 영남학파 (남명학파)의 거두로, "이황"과 함께, 경상도 사림의 쌍벽이었다. 천문ㆍ역학ㆍ지리ㆍ그림ㆍ의약ㆍ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으며,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1. 조식 (曺植ㆍ1501~1572ㆍ향년 71세)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ㆍ"명종ㆍ선조"에게서 "중앙ㆍ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 양성ㆍ1559년(명종14),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ㆍ부임했으나, 부임한지 얼마 뒤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 출 생 : 경상도 삼가현 토골(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 사 망 : 출생지 • 사 인 : 병사(노환)
• 호 : 남명(南冥) • 부 모 : 부 : 조언형(曺彦亨ㆍ승문원 판교ㆍ장원급제)ㆍ모 : 인천 이씨(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
• 처 : 남평 조씨(충순위 조수(曺琇)의 딸ㆍ김해 일대의 부자가문 출신) • 첩 (2명) : 성명 미상ㆍ은진 송씨 (송린의 딸) • 자 녀 : 4남 2녀ㆍ 조차산(曺次山ㆍ장자ㆍ요절) • 가 족 : 손녀사위 : 곽재우 (임진왜란 때, 의병 장군)
• 스 승 : 조언형(부친) • 제 자 : 곽재우ㆍ정인홍ㆍ김우옹ㆍ정구 등 수백 명의 문도(대체로 북인 정파)
• 친 구 : 소년기(죽마고우): 이윤경ㆍ이준경 형제ㆍ이항ㆍ송인수 / 청년기 :성수침 형제ㆍ성운ㆍ성혼
• 경 력 : 1538년(중종32ㆍ37세)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ㆍ덕성 수양ㆍ후학 양성에 전념
• 작 품 : 남명가ㆍ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 저 서 : 남명집ㆍ남명학기ㆍ신명사도(神明舍圖)ㆍ파한잡기(破閑雜記)ㆍ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ㆍ무진대사(戊辰對事):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ㆍ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 관료들(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

한미한 "양반"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ㆍ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단천"에서 지내면서, "유교 성리학" 외에도 "경전자사(經典子史)ㆍ천문ㆍ 지리ㆍ의방ㆍ수학ㆍ궁마ㆍ진법"등 다양한 지식ㆍ재능을 익혔고, 특히 정신력ㆍ집중력ㆍ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ㆍ유종원"의 문장과 "노장학"에 심취,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과거 공부보다도 "정통 유학ㆍ제자백가ㆍ노장사상"을 두루 접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조선 중기,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 좌ㆍ우도(현, 경상 남ㆍ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1531년(중종26)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장인인 "남평 조씨 충순위 조수(曺琇)"는 김해 일대의 부자가문 출신으로, 그는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학문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ㆍ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ㆍ정인홍ㆍ김우옹ㆍ정구"등 수백 명의 문도를 길러냈으며, 대체로 "북인"정파를 형성하였다.
1571년(선조5), "선조"가 특별히 "식물(食物)ㆍ전답"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01월, "경상도 감영"에서 조식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음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사후 "북인"집권 후 1613년(광해군7)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됐다. "북인"의 몰락으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1)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ㆍ이황ㆍ성혼ㆍ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 재평가되었다.
2. 불 출사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함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며,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으며,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출사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 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평하였다.
1538년(중종33), "이언적(경상도관찰사)ㆍ이림(대사간)"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황"은 그에게 "한성부"로 올라올 것을 권고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한다. "명종" 말엽에, "이량세력ㆍ윤원형"이 몰락했음에도 출사를 거부했고, "이기"의 일파도 몰락했으며, "선조" 즉위 후에는 "심통원 세력"까지 제거되었지만, 그는 조정에 출사하기를 거부하였다.
3. 이황과의 논쟁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으며,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이황"이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 더러는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뭐냐며, 추궁하기도 한다.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조식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이이ㆍ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 시키는 원인이 된다.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ㆍ"학문관"은 결국 "남인ㆍ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 제 자
현실ㆍ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 학파ㆍ남인 실학파"들이 실천ㆍ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선조" 즉위 후, "이황"의 문도들과 "이이"의 추종세력 간의 "이ㆍ기 논쟁"이 다시 벌어지자, 그는 이 모두 "공리공담"이라 비판하며, "실천ㆍ궁행"에 힘쓸 것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들 중에는 "이황ㆍ이이"의 문도들과 갈등하기도 했다.
제자로 "김효원ㆍ동강 김우옹ㆍ한강 정구"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곽재우ㆍ정인홍ㆍ김우옹ㆍ정구 등 수백 명의 문도 (대체로 북인 정파))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이황ㆍ기대승"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ㆍ기"에 대한 "이기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동강 김우옹ㆍ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ㆍ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계승되었다.
문인들은 "이황"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했으며,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될 때는 "박승임"의 문하생 일부와 함께 "북인"을 형성하였고, 일부는 "남인"이 되기도 했다.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은 "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했지만,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북인"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이이첨(정인홍의 문인)"이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그 뒤 "윤휴ㆍ허목" 등 일부를 통해, "남인"으로도 학맥이 일부 이어졌다.
5. 평가와 사상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ㆍ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그는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이익"은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 (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했다. 또한 "퇴계 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현실ㆍ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 학파ㆍ남인 실학파"들이 실천ㆍ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① 이익 (18C의 실학자)의 평가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 따로 "남명선생 문"이란 항목을 두고,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는 "조식"의 말을 인용하였다.
"남명선생 시"라는 항목에서는 "천 석 무게의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거나?"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시)라는 부분을 들며,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또한 "퇴계 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ㆍ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한평생 10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문인들은 "정인홍ㆍ이이첨" 등 대부분 "북인"을 형성하였으나, 제자 "정구"의 문하생 중 "허목" 등 일부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후일 "남인 성리학ㆍ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준다.
② 경상우도의 학파
16C 당시, "경상좌도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ㆍ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ㆍ남곤ㆍ김굉필ㆍ정여창"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宋)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ㆍ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ㆍ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ㆍ이괄의 난" 이후, "북인"이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임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 등 "경상우도" 일대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③ 실천 강조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ㆍ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ㆍ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ㆍ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④ 실사구시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⑤ 경의학
"척신 정치"에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냈던 조식은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敬義學)"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조식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ㆍ노장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ㆍ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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