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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서경덕 (중종ㆍ1489~1546)ㆍ황진이ㆍ박연폭포ㆍ송도삼절(松都三絶)

by 당대 제일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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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 (중종ㆍ1489~1546ㆍ57세)"은 "박연폭포ㆍ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 (松都三絶)"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ㆍ양명학ㆍ실학"등 유학자들을 통틀어, 스승이 없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인물로도 기록되는데,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겼다. 그는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으며, 스승은 "자연ㆍ책" 뿐이었다. 스승 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 유명하며,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 때문에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1. 서경덕 (徐敬德1489~1546향년 57)

조선 선조 때의 문신시인문장가유학자사상가주기파(主氣派)의 거유ㆍ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

 출 생 : 경기도 개성부 화정리(禾井里) 태몽 : 어머니 한씨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낳았다.        • 사 망 : 경기도 개성부        • 사 인 : 병사        •  : 화담(花潭)복재(復齋)

 부 모 :  : 서호번(徐好蕃수의부위(修義副尉)하급무관)- 보안 한씨          : 태안 이씨(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 1 : 이름 미상         자 녀 : 2 1 (서응가서응기)         스 승 : 서당(한학) 독학

 제 자 : 황진이전우치허엽박순박지화양사언이지함한백겸민순박민헌고경허신응시  /  "전우치"가 서경덕에게 도술을 도전하러 가다가, 서경덕의 집 근처에서 헤매다가 포기했다는 야사가 있다. "민순(閔純)"의 문인은 "윤효전한백겸"등인데, "윤효전" "백호 윤휴" 아버지였다. "박지화"의 문인인 "허교(許喬)"로 그는 "허목"의 아버지였다.

 친 구 : 조식(曺植)성운(成運)         경 력 : 1531(41) "생원시" 장원급제 (어머니의 요청) "대과벼슬" 단념 "성리학"의 연구         저 서 : 화담집(花潭集) : 학문 수행의 결과물로 책에서 "원이기이기설태허설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혔다. 섹알기(穡戞基)원이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태허설(太虛說)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동시대인인 "중종"때의 "조광조김정"등과 "인종" 때의 "이언적" 등이 현실정치에 적극 진출하여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 반면, 그는 이것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보고, "수신제가학문연구"에 치중전념하였다"중종" , 여러 번 "조광조 일파"나 온건파인 "김안국 일파남곤 일파" 등이 그를 여러 번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덕망 높은 인재들이 많은데, 어찌 내가 나가느냐"며 모두 거절한다31세 때, "조광조"등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오관산(五冠山) 화담(花潭)" "서재"를 세우고, 연구교육에 더욱 힘썼다.

1543(인종 즉위년), "이언적"은 그를 초빙하려 하였지만, 사양하였다오히려 그는 "인종"의 수명이 짧음을 예언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니, "이언적"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1545, "명종"이 즉위하자, "이언적"이 다시 그를 조정에 출사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자신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을 것이라며, 이를 거절하였다"명종" , "이준경" 등에 의해 여러 번 증직 건의가 있었으며, "6품 이상"의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3품 이상"의 직책에 증직을 청하는 부탁은 거절되었다.

사후 "명종" , "이준경"등의 추증건의로 증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가, 거듭 추증되어 "선조"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붕당"의 출현 이후, 제자들은 "동인북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붕당 출현 이후, "허엽박순"등을 따라 "동인"이 되었다가, "동인" "" 분당 이후 "북인"이 되었고, "북인" 1623(광해군15)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의 사상은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맥 중 일부는 "남인"으로 계승되었다.

2. 인 물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부터 말과 글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터득해서 쓰기 시작하였다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그 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전부였고,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02(12),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운행의 도수(度數)"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귀"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물었다"새가 땅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을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서산에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거나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 깊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해가 뜨고 지는 이유, 비가 오고 날이 맑은 것, 바람이 부는 이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산 사람과 시체의 차이점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서적들을 찾아 연구, 규명하려 하였다18세 때, "대학"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3. 평 가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이덕일(역사학자)"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서경덕의 이론 중, "이기설(理氣說)"은 북조선에서는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고 말한다"시인"으로도 활동하여, "조용하고 온화한 것을 즐기므로 많은 사람들이 사모했었고, 지은 시도 자유롭고 안서(安舒)하여, 강절(康節)의 기풍이 있었다 한다."는 평이 있다.

"유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도교적인 사상"도 일부 받아들였다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이단"이라며 공격하기도 했다한때 "김종직"의 문인이며,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이기(李芑)"가 그를 찾아와, 학문을 논하였으나 그는 "이기"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화가 난 "이기"는 대놓고 노기를 드러냈다고도 한다.

4. 사상과 신념

 실천 중심론

그는 "실천직접 연구탐구"를 통해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진리"는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 <격물치지 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그가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생사일여론

그는 "" ""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가 곧 ""라고 생각했다또한 사람이나 생명이 살아있을 때는 ""가 있고, 죽었을 때는 그 ""가 빠져나가는 것이며, 다만 육체에서 ""가 빠져나갔지만, ""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보았다그의 학문적 요체는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것은 곧 서구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생물에게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에너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말하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우주와 만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기 철학자" "최한기"는 그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5.  황진이와의 교류

※ 황진이 (黃眞伊) : 진랑 (眞娘)ㆍ1506~1567향년 61

• 출 생 : 경기도 개성부      • 사 망 : 경기도 개성부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       사 인 : 병사       별 칭 : 명월 (明月ㆍ기생 이름)       대표작 : 만월대 회고시ㆍ박연폭포 시

중종ㆍ명종 때(16C 초ㆍ중순) 활동했던 기생, 조선 중기의 시인ㆍ기녀ㆍ작가ㆍ서예가ㆍ음악가ㆍ무희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맹인?)의 서녀(庶女)로 출생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技)"이기도 했다뛰어난 "시 재주ㆍ학식ㆍ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다.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대표작 : 만월대 회고시ㆍ박연폭포 시)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었다"벽계수" "지족선사"를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지족선사"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다.

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다물론 "서경덕" 혼자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이었다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다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이었다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서,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하고는,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 읽기를 계속했다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황진이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밥까지 차린 모양이었다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물론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다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황진이가 진심으로 가슴에 품었던 인물이 "서경덕"이었다고 한다.

황진이도 "서경덕"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는데, 황진이가 오는 날이 뜸해졌다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가 들렸다오는가 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 하여, 영창을 닫고, 불을 껐다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황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경덕"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노래를 읊었다. "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황진이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 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황진이는 문밖에 와있었다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임을 속여 월침 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 없는가?"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었다임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임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었다잎 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황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서경덕"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 황진이가 서경덕이 죽었을 때, 지은 시 >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주야로 흐르는 물이 옛 물이 있을 소냐.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여, 가고 아니 오더라.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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