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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문열 (1948~ 李文烈ㆍ이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당대 제일 2025. 4. 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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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1960년대 "김승옥 (1941~1999ㆍ겨울여자 작가)", 1970년대 "황석영 (1943~ ㆍ장길산 작가)"가 있었다면, 1980년대의 대표 작가는 "이문열"이었다. 이와 함께 우파 논객으로서의 행보 역시 여러 측면에서 주목받아왔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이후 능란하고, 교양적인 문체와 다양한 작품세계를 지닌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1976년, 전역 후, "경북 대구시"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했고, 이듬 해에는 "매일신문사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79년 (32세), 중편소설 "사람의 아들"이 대박을 치면서, 순식간에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1980년대가 전성기로, 유명세와 다양한 작품세계, 판매량을 따라갈 다른 작가는 없었다.

1. 생애

1948,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아버지 "이원철 (李元喆1915 ~ ?)"32녀 중 3째 아들로 태어났다"이원철""수리학 (水理學, hydraulics)"의 권위자로,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2회 브나로드 운동"에 계몽대원으로 참여하는 등 당시에 의식있는 인텔리였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당시 "신사상"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815광복 직후에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했다. 그 뒤 1950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시점령 "서울대 농대 학장"으로 임시 임명책임자를 맡았다가, "인천 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북한에서도 대학교수연구소 소장 등을 맡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하며,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든 뒤에는 좌천되어서, 함북 변방의 조그만 농장 관리인으로 말년을 초라하게 보냈다.

어머니 "조남현(曺南鉉1917~1995)""이문열"을 임신하고 있을 때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그만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 이사를 자주 다니는 바람에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ㆍ대학교를 모두 중퇴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은 도합 8년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한주먹 했던 작가로도 유명한데, 이 암울한 청소년기 때문이다"대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거쳐, 1968"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0년 대학교를 중퇴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3번 연속 낙방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했어도 당시에 남아있었던 "연좌제" 때문에, 교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2. 특징

①  읽기 쉬우면서도, 맛깔나는 문체

"읽기 쉬우면서도, 맛깔나는 문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만연체"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글의 리듬감이 좋아서 잘 읽힌다. 묘사는 대단히 치밀하고 치열하다.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문열은 글쓰기에 악마적인 재주를 가졌다", 이 점만큼은 인정한다. 또한 책의 제목을 짓는 센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②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

소설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모색하려 했다.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 "영웅은 일그러진 존재". 완전무결해 보이지만, 실상 컴플렉스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일그러진 존재들이다. 몰락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참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묻고 있다.

③ 영웅 찬가

소설에서 내보이는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영웅 찬가". 소설 속의 사회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를 만드는 "영웅"과 말만 많은 지식인, 그리고 이들에게 휩쓸려 움직이는 대중으로 이루어졌다. 소설 "영웅시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경우, 주로 빨치산을 하다가 사살당하거나 월북한 걸로 나온다. 이는 작가의 가족사 때문인데,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포함한 처자식을 버리게 했던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1960년대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처자식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곳에 간 사람을 힘든 상황에 몰아넣은 북한이 용서되지 않았다고 한다.

3. 주요 작품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 (1979)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1980)젊은 날의 초상 (1979~1981)황제를 위하여 (1980~1982)대륙의 한 (1981~1986)영웅시대 (1982~1984)레테의 연가 (1983)미로의 날들 (1983~198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87)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1984~1989)시인 (1990)변경 (1986~1998)오디세이아 서울 (1992)선택 (1996~1997)아가 (2000)초한지 (2002~2006)호모 엑세쿠탄스 (2006)불멸(죽어 천년을 살리라) (2009)리투아니아 여인 (2010~2011)

단편소설

새하곡 (1979)들소 (1979)그해 겨울 (1979)어둠의 그늘 (1980)필론과 돼지 (1980)금시조 (1981)사과와 다섯 병정 (1981)익명의 섬 (1982)칼레파 타 칼라 (1982)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시인과 도둑 (1992)아우와의 만남 (1994)사로잡힌 악령 (1994)달아난 악령 (1995)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 (1998)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2001)

4. 처음부터 "우파적 성향"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집안은 "빨갱이 가족"

집안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사찰을 당하고, 이웃에게서 멸시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게 동네에 소문나면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이사한 동네에서 또 들통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하는 통에 그는 젊은 시절 전국 곳곳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떠돌던 삶이 "재령 이씨"로서 상당한 양반 가문에 대한 집착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모진 고통 속에 살았던 그의 모친은 "남편이 북에서 새장가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거를 겪은 그의 삶과 문학 속에서 "좌파에 대한 혐오감"이 발견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배고픈 시절을 겪어본 사람답게 "천민자본주의물질만능주의"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이다.

② 초기작들은 "황석영 (1943~ ㆍ장길산 작가)"보다 더 진보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우파적 성향"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작들은 "황석영"보다 더 진보에 가까운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 "그해 겨울"에서 "중립"에 가까워졌다가, "필론과 돼지"에서 조금씩 우파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사람의 아들'삼국지"의 문학적 성공과 월북한 부친을 부정하는 자기 검열을 거치며, 그는 "우파"로 이동해갔다.

"필론과 돼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을 전역병들을 삥듣는 양아치 "베레모"로 은유한 것이 문제가 되어, 현역 "공수부대 부사관들"이 그를 찾아서 혼내주겠다고 출판사에 집주소를 캐묻는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끝내 5공 내내 "금서"로 지정되었다.

"5공화국" ,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제의

"좌파 진영"에 대한 거부감은 오래전부터 밝히고 있다. 초기작들에서도 그런 기색이 엿보여서, "좌파 문단세력"으로부터 반동 취급을 받는다. 세간에서는 정치적 행보와 얽혀, "진보 진영"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소설가 황석영"과는 대조적으로 보수 진영을 상징하는 문인으로서 서로 대립항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꺼리낌 없이 지내는 듯하다.  "5공화국" ,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2004,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있다.

의외로 1990년 무렵, "장기표이우재" 등의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1992, 총선에서 그는 "민중당의" 지원 연설은 물론, 포스터 등장까지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로 "민중당"을 적극 도왔는데, 이는 "이재오"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재오"는 그의 고향 선배이자 같은 "재령 이씨"로 그에게 먼 친척뻘인 친한 동네 형이었는데, 1980년대 "전두환 정권" , "이재오"가 민주화 운동을 하며, 투옥과 수배를 반복하던 시절, "이재오"가 아무 출판사나 찾아가 "문열이가 글을 써줄 것"이라며, 외상으로 돈을 자주 빌려가, 민주화 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군말 없이 밤새워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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