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캠프 : 강금실 (1957~ ) 법무부장관ㆍ판사
헌정사 이래, 역대 "최연소 법무부장관"이었으며,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기도 했다. 1990년, 최초로 "여성 형사독판사"가 됐다. "대통합민주신당ㆍ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005.04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선대위"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에 "강금실 (1957ㆍ법무부장관)ㆍ윤여준 (1939ㆍ환경부장관)ㆍ정은경 (1965ㆍ초대 질병관리청장)"이 합류했다.
1 "우리법연구회" 창립 주축
1957년,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교육자인 아버지의 2남 4녀 중 4째 딸로 태어났다. "경기여고ㆍ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83~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88년, "2차 사법파동"을 계기로 "박시환ㆍ김종훈" 등과 개혁 성향 법조인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창립"을 주도했다. "강금실" 등 "우리법연구회" 창립했던 주축은 1993년 "3차 사법파동"을 이끌며, "김덕주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에서 물러나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2001~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변)"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 최연소 법무부장관ㆍ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
2003년, "참여정부"에서 "초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헌정 사상 "최연소 법무부장관"이자,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었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녀를 천거한 사람이 청와대 민정수석인 "문재인 (그녀의 사법연수원 1기수 선배)"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문재인"은 그녀를 "환경부장관ㆍ보건복지부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노 대통령"은 "여성이 그런 부처 장관에만 임명되는 것은 고정관념"이라며, "법무부장관ㆍ노동부장관"에 기용할 뜻을 밝힌다. 그녀는 "문재인"에게 "노동부 업무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여서 망설여지지만, 권력기관인 법무부에서 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법무부장관 직"에 뜻을 보였고, "노 대통령"은 그녀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한다.
"노 대통령"은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와 여성이 임명되는 영역이 특정 부처에 국한되어야 하냐는 고정관념 타파"를 이유로 임명을 강행한다. 이로 인해, 검찰 내 비주류가 계속 지적했었던 "조직순혈주의ㆍ남성중심주의ㆍ기수중심주의ㆍ관료이기주의"가 깨졌다.
3. 순탄하지 않았던 "법무부장관직", 평검사와의 대화
그러나 "법무부장관 직" 수행은 순탄치 않았다. 스스로 평가하듯, "검찰을 개혁하는 힘"이 부족했다. 임명으로 인한 상징성은 컸지만, 조직 실태파악 및 팀을 꾸리는데 실패했다는 자평이다. "법무부" 자체가 주요 포스트를 검찰파견 인력으로 채웠기에, 검찰주류 시각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법무부 파견검사도 친정으로 돌아가면, 인사권을 가진 검찰 주요책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임명 직후, "법무부 + 청와대"에서 기존 관례를 깨고, "검찰총장"과의 상의없이 검찰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검찰이 반대건의서를 올리는 등 집단 반발했으며, 이 때문에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인사를 하도록, "검찰청 법 34조 1항"이 개정되는 일도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강금실ㆍ법무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일부 평검사들은 "인사권ㆍ예산권 이관" 등 검찰의 독립을 요구했다. 검찰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 대통령ㆍ강금실"은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기획했지만, 검사들은 대화할 의지없이 "대통령을 조롱하고, 뻣뻣한 자세"로 일관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의 존폐 문제 등을 두고, "송광수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 지도부ㆍ 참여정부의 갈등도 계속됐다. 검찰개혁에 대해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검찰에서는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반발하여, 개혁을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2004.07월 개각 때,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다.
4.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 (2003.03.09)
2003.03.0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노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검찰 인사권" 등을 두고 벌인 토론회로, TV로 생중계되었다. 여기서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는 발언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토론의 목적은 "당시 참여정부에서 검찰 수뇌부의 힘을 빼서, 개별 검사들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에 대해, 젊은 평검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대통령이 검사장도 아닌 평검사들을 모아, 연설이나 훈시도 아닌 토론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당시 "기수파괴" 등 검찰 수뇌부의 힘을 빼기 위한 인사조치가 평검사들의 눈에는 청와대가 검찰을 무시하는 조치로 보였고, 오히려 반발하면서, "검찰총장"에게 인사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평검사들은 "청와대의 입김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외부 인사들이 검찰의 인사행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강한 반발을 보였고, "노 대통령"은 공세에 "저분들이 외부인사입니까? 저분들 의심하십니까?"라고 반박을 하기도 했다.
< 검사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 "노 대통령"에게 >
(박경춘 검사) 과거에 언론에서 대통령께서 83학번이라는 보도를 봤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저도 그 보도를 보고, "내가 83학번인데, 동기생이 대통령이 되셨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는 말을 하면서, "노 대통령"의 학력을 우회적으로 비하하거나,
(허상구 검사) 대통령께서는 토론의 달인입니다. 저희들은 토론과는 익숙지 않은 그야말로 아마추어들입니다. 검사들을 토론을 통하여 제압하시겠다면 이 토론은 좀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라면서, 사실상 이런 토론 자리를 마련한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참석자 (괄호는 기수임) >
노무현 (7ㆍ대통령)ㆍ문재인 (12ㆍ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ㆍ강금실 (13ㆍ법무부장관)ㆍ박범계 (23ㆍ대통령비서실 민정2비서관)
박경춘 (21ㆍ검사ㆍ서울지방검찰청)ㆍ이석환 (21ㆍ검사ㆍ인천지방검찰청)ㆍ이옥 (21ㆍ검사ㆍ서울지방검찰청)ㆍ이정만 (21ㆍ검사ㆍ서울지방검찰청)ㆍ허상구 (21ㆍ검사ㆍ서울지방검찰청)ㆍ김영종 (23ㆍ검사
ㆍ수원지방검찰청)ㆍ이완규 (23ㆍ검사ㆍ대검찰청 검찰연구관)ㆍ김윤상 (24ㆍ검사ㆍ법무부 검사)ㆍ김용남 (24ㆍ검사ㆍ광주지방검찰청)ㆍ김병현 (25ㆍ검사ㆍ울산지방검찰청)ㆍ윤장석 (25ㆍ검사ㆍ부산지방검찰청)
5.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퇴임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열린우리당"의 참패가 예고됐던 선거에서 그녀는 한때 "홍준표ㆍ맹형규" 등 "한나라당" 후보군을 앞지르며, "열린우리당"의 희망으로 떠오르며, 첫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이 "17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뒤, 정치를 떠나있던 "오세훈"을 불러들여 출마시켰다. 결국 그녀는 선거과정 내내 뒤지다, 더블 스코어로 참패했다.
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의 최고위원에 임명된다. 이때 "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제의를 받았으나, 불출마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