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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공자의 제자 (3인) : 안회 (안연)ㆍ자로 (계로)ㆍ자공 (단목사)

by 당대 제일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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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회 (안연)ㆍ자로 (계로)ㆍ자공 (단목사)  :  공문십철 (孔門十哲)  3인  > 

• 인 (仁) : 안회 (顔回)ㆍ안연 (顔淵)BC 514~ 483 (31세?)ㆍ노나라 출신 (산둥지방)

용 (勇) : 자로 (子路)ㆍ계로 (季路)BC 542~ 480 (62)ㆍ노나라 출신ㆍ공자보다 9살 연하

지 (智) : 자공 (子貢)ㆍ단목사 (端木賜)BC 520~ 456 (64)ㆍ위나라 출신ㆍ공자보다 31살 연하

"논어사서" 등에서 "자공""공자"에게 칭찬면박을 동시에 받는데, 이는 "자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공자"에게 면박을 듣지 않은 제자는 "안회" 1명 밖에 없었고, "안회"도 너무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 , 자신의 수제자 중에 "안회"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남은 제자는 "자공자로" 둘 뿐이었던 것이다. 제자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개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스승의 입장에서 가장 아끼는 제자를 독려하는 말들이었다. "자공"은 일신의 능력은 출중하나 자부심이 강하고, 겸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자"는 자주 그에게 충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로"도 마찬가지로, "자로""공자" "안회자공" 이상 가는 친분이 있었지만, 매일 꾸중을 듣는 것이 일이었다배운 것을 조용하고 성실히 잘 실천하는 "안회"를 본 "공자"는 이것이 "자공자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작용하여, 가장 열심히 지도했다는 해석이다.

1. "공문십철 (孔門十哲)" 3

덕행 (德行)에는 안회 (顔淵 / 안연 (顔淵))민자건 (閔子騫)염백우 (冉伯牛)중궁 (仲弓),    언어 (言語)에는 자공 (子貢 / 단목사 (端木賜))재아 (宰我) 정사 (政事)에는 자로 (子路 / 계로 (季路))염유( 冉有),  문학 (文學)에는 자유 (子游일명 언언)자하 (子夏일명 복상)가 뛰어났다.   < 논어  선진 (先進)  >

중국의 철학자 "공자 (孔子BC 551~ 479향년 72)"가 말한 10명의 우수한 제자를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10대 제자", "예수""12 사도"와 같은 개념의 인물들이다"공자"는 제자가 약 3,0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제자를 가리켜 "72()"이라고 칭했고, 그 중에서도 최고 10명을 뽑은 것이 "십철 (十哲)"이다.

 

2. 인 (仁) : 안회 (顔回)ㆍ안연 (顔淵)BC 514~ 483 (31세?)ㆍ노나라 출신 (산둥지방)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로서, 공자 제자 3,000명 중 넘버 1이다. "공자"와 친척관계라는 설도 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정치가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안회"""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딱히 본인의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자는 "자연 (子淵)". "안자연"이라고 불리워야 했으나, "공자""자연"에서 ""자만 따서 "안연 (顔淵)"이라고 불렀다.

"공자"가 대놓고 "극찬만 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논어 위정편"에는 "오여회, 언종일 불위여우,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회야불우"라 하며, "안회"를 극찬한 부분이 나온다.  "공자""안회"와 하루종일 대화를 해도, 자신의 이야기에 토를 달거나 반문하거나, 하는 일이 없어 어리석은 자 (못 알아들어서 질문하지 않는 자)인가 했는데, 이후에 실제 "안회"의 사생활을 알아보니 자신이 말해준 것들을 모두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그가 어리석기는커녕, 자신의 가르침을 질문도 없이 모두 이해한 "훌륭한 제자"라 극찬한 것이다. 어쩌다 한 질문도 엄청나게 규모가 큰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논어 안연편"에서 "유가"의 본질인 "()"이 뭐냐고 대놓고 공자에게 물었다.

"안회"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덕을 수양하는 것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다. 또한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의 상징"이 되었으며, "공자"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성균관"에 배향된 5성에서 "공자" 다음의 위치에 있다. 나머지 셋은 "증자자사맹자"이다. 전형적인 "백면서생" 타입이라 초반에는 괄괄한 성격의 "자로"와 티격태격했으나, "자로""안회"의 덕행에 감격해 서로 돕고 돕는 친우가 된다.

문일지십 (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은 "안회" 때문에 나왔다. 정확히는 "공자자공"의 대화에서 나온 것으로, "공자""자공"에게 "안회와 너를 비교하면 누가 더 나은가?"라고 질문하자, "자공""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겨우 둘밖에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네 말이 맞다. 너와 나 모두 안회를 따라가지 못한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공자"가 강의한 이후에 질문을 하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자, "공자"가 의문을 품고 문답을 하였는데, "몰라서 질문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말을 다 알아듣고, 이해해서 질문을 안 한 거였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좋은 의미에서) 인간 같지 않은 품성의 소유자로, "자신의 화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不遷怒불천노)"는 특징을 가졌다. 수평폭력을 행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인데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격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요절 : 29? 32? 40?

안회가 죽자, 공자께서 곡하셨다. 이에, 따르던 자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애통해 하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애통해 하였느냐?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느냐?" < 논어 선진 (先進)9>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子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그러나 천재는 요절한다던가, 안타깝게도 가난하게 살면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굶는 일이 허다해지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설에는 29세에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버렸고, 결국 32세에 요절하고 말았다고 하나, 32세에 죽었다는 것은 후세의 착각으로 보인다"공자""천하 주유"에 동행한 점이나 "자로자공" 같은 사람들과의 교우 문제를 봐도 그렇게 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40대 중후반에 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사망 시기가 40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요절"이라고 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공자"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 (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훗날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와서, 제자 중 으뜸이 누구냐는 질문에 "공자" "안회만이 내 뜻을 알았소. 하지만 지금은 죽고 없다오"라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3. 용 (勇) : 자로 (子路)ㆍ계로 (季路)BC 542~ 480 (62)ㆍ노나라 출신ㆍ공자보다 9살 연하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무인이다. "공자"의 핵심 제자 "공문십철"의 한 사람. 본명은 "중유 (仲由)", "자로 (子路)"는 자()이다.  본래 야인(野人) 출신이었으며, 힘도 셌다. 그 이름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공자"의 말에 의하면, "자로"가 제자가 된 후, "공자"를 험담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공자"의 여행 동안 고난을 함께 하였다. 주로 "공자"의 호위를 자처하며, 시기하는 무리들로부터 "공자"를 여러 번 지켜내기도 했다. "안연자공"과 함께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성격 때문에 "베드로 (예수 제자)"와 비교되기도 한다일찍이 누군가 "증서 (曾西증자의 아들)"에게 물었다. "당신과 자로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하겠습니까?" "증서"가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말하였다. "그분은 제 아버지께서도 경외하셨던 분입니다." < 맹자 (孟子) 공손추 상 (公孫丑 上) >

"공자"와 만남

어느 날, "공자"가 강론하고 있는 현장에 뛰어들어, "공자"에게 행패를 부리려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오늘날 "자로""공자"3대 제자 중 하나로 추앙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아생전의 일생뿐만 아니라, 실로 그에 대한 만세의 평가를 바꾼 만남인 셈이다.

"자로"는 제자라기보다 친구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으나, 엄연히 "자로""공자"를 경어로 부르는 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친구 설이 맞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 "공자"의 제자 중에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이 서술되어 있는 것은 "자로"뿐이므로, 서로의 거리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친밀하고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나이 차도 9살 밖에 되지 않으므로, "공자"도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자로"를 더욱 편하게 대했던 듯하다.

"공자"의 평가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자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 안연편"에는 "자로"는 약속을 다음 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의하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고, 일단 배우면 깨우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자로"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했는데, 또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까 겁냈다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고 할 정도로 열심인 제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혈기왕성한 "자로"를 자주 꾸짖기도 했지만, 한번 가르치면 충실히 따르는 "자로"를 몹시 아꼈다"공자" 문하에서는 "자공"과 함께 제후들의 영입 제의가 많이 들어 온 사람이지만, 정작 "계자연이 자로가 대신감이냐""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신하 머릿수만 채울 자다"라고 말했다.

"논어"를 보면, "자로"는 혼나는 게 일이다.

스승을 위한다고 예법에 어긋나게 높이다 까이질 않나, 심지어 칭찬 듣고 좋아한다고 혼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의 "()"을 칭찬하니까, 좋아서 자신의 신조로 삼고자 그 말씀을 받아적었는데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라는 면박을 들었다.  "공자"에게 하도 깨져서, 나중에 온 어린 제자들까지 "자로"를 무시하자, "공자"는 방안에 들일 정도는 아니라도 마루에 앉을 정도는 된다며 감싸기도 한다.

학구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먼 불같은 성정을 가졌고, 학문에 뛰어나지도 못했던 탓에, 학식과 예를 중시하는 "공자""자로"를 높게 평가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스승인 자신보다도 그 용기와 강직함이 뛰어나다고 인정할 만큼 고지식하고 충직하여, 가장 아꼈던 제자이기도 하다. 학문의 제자로써 가장 아꼈던 이가 "안회"라면, 인간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아꼈던 이는 "자로"인 셈이다이런 점 때문인지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제일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죽음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괴외 (위출공의 아비)"와 자신의 주공 "공회"의 반란으로, "출공"이 쫓겨나자, 그 소식을 듣고 성으로 갔다. 가는 길에 동문인 "자고"가 말렸으나 듣지 않고, "그 녹을 먹은 자, 그 난을 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며, 성으로 가,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주군 "공회"를 죽일 것을 "괴외"에게 요구했다. 주군을 바꾸어 섬기는 이런 자는 쓰지 말고, 잡아 죽이자고 한다.  "괴외"가 거부하자 그들이 올라있던 대()를 불태우려다 "괴외"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죽을 때 칼에 맞아 머리에 쓴 "()"이 삐뚤어지자 한마디 외쳤다"보아라! 군자는 죽어도 관 ()을 벗지 않는 법이니라!" 그리고 관을 제대로 고쳐쓴 뒤, 사망했다.

"자로"는 처형된 뒤에 "저해 (菹醢)"를 당하여, "인간 젓갈"로 만들어져 "공자"에게 보내졌다. "공자"는 이 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집안의 젓갈들을 모두 다 내던져 버렸고, 멀쩡한 젓갈만 봐도 저 일을 생각하며 입에 대지 못했다. 결국 "공자""자로"가 죽은 이듬해 세상을 등졌다.  "공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자로"의 강직한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예견했다고 한다. "자로"의 부음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자"가 했던 말은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끊어 버리는구나"라고 2번 외쳤다. 사서에 기록된 "공자"가 제자의 죽음에 절규했던 이야기는 "안회"가 절명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통곡한 것과 "자로"의 죽음까지 2번 나온다. "자로"가 죽은 뒤에는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뒤에, 나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경애하던 스승에 대한 비난을 폭력을 이용해서라도 막았던 "자로"의 죽음에 대한 탄식이었다.

 

4. 지 (智) : 자공 (子貢)ㆍ단목사 (端木賜)BC 520~ 456 (64)ㆍ위나라 출신ㆍ공자보다 31살 연하

"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가 패자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번 돌아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5나라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 사기 중니제자열전 >

조국인 "노나라""제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공자"는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자로"가 나섰고, 그 다음으로 "공손룡전손사"가 함께 나섰으나, "공자"는 모두 물리치고 3번째로 나선 "자공"을 보낸다. 그러자 "자공"은 뛰어난 언변으로 ""를 침공하려고 하는 ""의 대부 "전항 (田恒)"에게 가서 그를 설득해, 강성한 ""를 치는 것이 ""에 있어 얼마나 이득인지 설득하고, ""에 가서 "오왕 부차"에게 ""를 돕는 것이 패자가 되는 길이라고 설득하고, 뒤쪽의 "" 걱정된다고 하자, ""로 가서 "월왕 구천"에게 ""를 돕는 척 하면서, ""의 빈틈을 노리라고 조언한다다시 ""로 가서 ""의 과도한 지원을 막고, ""를 도우면서 ""까지 치는 것을 건의한 후, ""으로 가서 ""의 침공이 걱정되니, 방비를 단단히 하라고 조언한다.

결국 "자공"이 국제무대에 한번 등장하니 ""를 구하고, ""를 뒤흔들고, ""를 멸망시키고, ""을 강대하게 만들고, ""을 패자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자공" 한 사람에게 5개 나라가 놀아난 것이니, 신의 경지에 달한 "언변"을 볼 수 있다. 다만 해당 내용은 "춘추좌씨전"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으로, "사마천"의 창작일 가능성도 있다.

장사사업 수완에도 뛰어나, 돈을 많이 벌어서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자공"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며, 돈을 잘 굴렸다.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두기도 하였고, "제나라"에서 삶을 마쳤다. < 사기 중니제자열전 >

"공자"에게 배운 다음, 스승을 떠나 "위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고, "조나라노나라"에서 물자를 쌓아두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그리하여 "공자"70여 제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해졌다. "공자"의 제자 중, "원헌" 같은 이는 술지게미와 쌀겨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뒷골목에 숨어 살고 있었던 것에 비해, "자공"4두마차를 타고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제후들과 교제하였고, 가는 곳마다 왕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대등한 예로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퍼진 것도 그가 "공자"를 모시고 다닌 덕분이었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어 그 이름이 더욱 높아진다"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 사기 화식열전 >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나, 재상 직도 여러 차례 지냈는데, 그의 이러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이 "논어"에 실려있다"자공"이 말했다. "주왕의 선하지 못한 점이 그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니, 세상의 악한 것들은 모두 그리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 논어 자장 >   이 말은 군자가 악행을 꺼리는 이유를 말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한 나라의 마지막 군주는 다음 왕조에 의해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얘기로도 해석될 수 있어, 군자에 대한 사상을 표현함과 동시에 자공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 같아서,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 < 논어 자장 >   군자의 거동은 공개적일 수밖에 없어서, 공실이 온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게 되는 세태를 통찰해낸 말이라 할 수 있다.

공자와의 일화

"자공""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너는 그릇이다." 라고 말했다. "자공"이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공자""종묘에서 쓰는 호련이지."라 말했다. 이 표현에는 2가지 해석이 있다. 1째로는 "공자"가 이전에 "군자불기 (君子不器. 군자는 특정한 그릇처럼 규정된 형태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므로, 결국 "너는 능력은 뛰어나긴 하나, 군자 까지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라는 해석, 2째로는 "공자"는 예를 굉장히 중요시했기 때문에, "최고의 예식을 관장하는 종묘의 제사에 쓰는 옥그릇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쓰임이 있다"는 의미라는 해석이다.   "자공"이 남들의 단점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공자""()는 현명한 사람일까? 나는 그럴 겨를이 없는데" 라고 말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난 남 욕할 시간도 없던데 넌 뭐가 그리 잘났냐?" 정도의 뜻이다.

어느 날, "공자""자공"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라고 묻자, "저는 남이 제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행동을 제가 남에게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화려한 언변이 었는데, "공자"가 답하기를 "너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멀었다."고 답했다.것이 "자공자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작용하여, 가장 열심히 지도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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